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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윤희상 기자를 기리며

전 청와대 춘추관장,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김기만 칼럼
'UP-E-292'.

무슨 엄청난 지령을 담은 암호가 아닙니다.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에 있는 유토피아 추모관(UP) E구역 292번 수목을 말합니다.

이 나무 밑에는 지난 2014년 오늘 만 53세로 우리 곁을 일찍 떠난 전 동아일보 기자 윤희상 박사가 묻혀 있습니다.

8주년 기일에 그를 찾아갔습니다. 나이로는 7살, 입사로는 5년 후배인 그와 깊은 인연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그를 죽음으로 내몬 원인의 작은 부분일 망정 제가 있지 않나 자책하기도 했었습니다.

윤희상은 1986년 12월부터 2001년 5월까지 15년 가까이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사회부, 경제부, 체육부를 거치면서 취재 좋고 기사 잘 쓰는 '민완기자'였습니다.

그는 2000년 7월 LG상남언론재단의 해외연수자로 미국 메릴랜드 대학 저널리즘 스쿨에 유학합니다. 1년의 연수기한이 됐을 때 그는 기로에 섭니다. 공부를 좀 더 하고, 학위도 따고 싶었기 때문이었죠.

동아일보 경영진에 유학기간 연장을 요청했으나 당시 회사에 밉보이는 상태였던 터라 퇴짜를 맞았습니다. 밉보이는 이유는 그가 1998-1999 동아일보 노조위원장이었을 때, 회사측과 맞서는 '강경파'로 분류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무렵 동아일보에서 노조위원장을 한다는 것은 감옥 담벼락에 발 하나를 걸치고 있는 셈이나 같은 심경이었습니다. 1974~5년 '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대사건을 겪은 후 회사 측은 노조에 매우 과민했습니다. '동아투위'의 시발도 노조에서 비롯했기 때문이지요.

공부 지속을 놓고 고심하던 윤 기자는 청와대 비서관으로 일하던 제게 귀국 여부를 상의해 왔습니다. 저는 단호히 말했습니다. "김병관 회장(2008년 작고) 체제의 동아일보에 무슨 희망이 있느냐. 사표 내고 박사학위 따서 강단에 서는 게 낫겠다"

그는 이에 따랐습니다. 아닙니다. 아마도 이미 마음 속에 퇴사를 굳혔고, 제게는 확인하는 정도였을 겁니다.

故 윤 기자는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 그로부터 불과 3년 후인 2004년 메릴랜드 대학에서 언론학/공공커뮤니케이션 박사학위를 받습니다. 그리고 귀국합니다.

2004년 귀국한 그는 2005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곧 이어 국정홍보처에 취업해 미국 로스앤젤레스 총영사관에서 공보관으로 근무합니다.

윤 박사는 2008년 귀국한 뒤 부지런히 대학교수 자리를 알아보던 중 2009년 K대학에 교수직이 확정되어 교수실 배정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안기부가 개입해 그의 교수 임용을 무효화 해버립니다. MB 정권 초기였고, 동아일보 노조위원장을 한 반골이며, 광주 출신이고 노무현 정권 때 해외공보관까지 역임한 자이니 "우리 편이 아니다" 싶어 핀셋으로 고르듯 집어내 잘라버린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족들에 따르면 이 때 큰 충격을 받았으며, 그 이후부터 문제의 '소뇌 위축증'이 조금씩 생겨났다고 합니다. 신문사도 걷어치우고 나와 공부했고, 정상적인 공모과정을 통해 교수직을 얻었는데, 이게 권력의 훼방으로 무산되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요?

윤희상은 광주 출신입니다. 광주 동신고교를 거쳐 만 20살 때인 1980년 전남대 2학년생으로 광주항쟁을 맞습니다. 어땠을까요? 전남대가 5.18 광주민주화항쟁의 시발점인데, 물론 열심히 참여했지요.

이런 그를 보호하기 위해 부모님이 감싸 안습니다. 5남 1녀의 막내인 그를 교사였던 아버님은 전남에서도 광주와 거리가 먼 저 아랫지방으로 피신시킵니다. 막내를 잃을 수 없다는 걱정에서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동아일보 입사 후 개인적으로 좀 친해지기 전까지 그는 '광주'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1987년 제가 주도해 동아일보 노조를 만들고, 그가 1998년 본인의 의지와 제 권유에 따라 동아일보 노조위원장(12대)이 된 이후 자주 만나게 되면서 차차 광주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요체는 현장에서 도피했다는 '부끄러움', '죄의식'과 희생한 분들에 대한 부채의식이었습니다. 죽어간 친구들의 환영이 보일 때의 고통과 그들에게 빚졌다는 참담함 등으로 힘들다는 호소였습니다.

이해됩니다. 스무 살 청년이 대학생으로 광주를 몸 전체로 겪다가 시골로 숨어든 셈이니, 나중에 '광주의 최후'를 알게 됐을 때의 심리적 상실감과 죄의식이 어떠했을지를 말이죠. 자아가 너무 깨끗한 청년이었기에 더했으리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제 서가 한 켠에 소중히 꽂아 놓는 한 권의 책, <그들만의 언론>은 윤 기자가 출간한 유일한 책입니다. 그의 책 맨 끝에 있는 <남기고 싶은 말>을 보다가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박사과정 학비를 벌기 위해 나도 교수신문 편집자 알바를 했지만, 아내는 마트와 햄버거 가게, 세탁소 등을 전전하며 하루 10시간 이상씩 일해 살림을 꾸렸다. 박사학위 논문과 책의 출간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내의 공이 있음을 꼭 기록해두고 싶다"

이 글을 빌려 윤희상의 아내 조용애 씨와 딸 호수(34), 정수(31) 두 자녀에게 신의 가호가 같이 하기를 빕니다. 조용애 씨가 너무 장하고 고맙습니다.

기자 다웠던 기자, 정의롭고 따뜻했던 인간, 평생 '광주'를 끌어안고 진통했던 윤희상의 안식을 거듭 기원합니다.
 
 
 
전 청와대 춘추관장,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김기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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