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치형(安置刑)’은 조선 시대의 유형(流刑)으로서 죄인을 먼 곳에 보내 그곳에만 머물게 하고 다른 곳으로 옮기지 못하도록 주거를 제한하는 형벌이다.
그 대상지는 일정치 않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거리와 장소를 달리하여 본향안치(本鄕安置), 주군안치(州郡安置), 절도안치(絶島安置) 등으로 나누어졌다.
안치형에 처한 죄인으로서 죄가 더욱 무거운 자에게는 부가형으로 위리안치(圍籬安置) · 천극안치(栫棘安置) · 가극안치(加棘安置) 등을 적용하였다.
‘위리안치’란 허허벌판에 돌 웅덩이를 만들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형벌이다. 주변에는 탱자나무를 심어놓고 한곳 만을 트이게 해서 감시를 했다. 죄를 지은 사람을 죽기 전에 임시로 가두어 놓는 형벌인데,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미 위리안치가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유배지에서 외인의 출입을 금하며 외부와 접촉하지 못하도록 한 중죄인의 형벌로서 일종의 유배지에서의 가택연금 같은 셈이다.
sns 친구들이 5천을 넘어서자 예전에 즐겨 읽던 분들의 글이 잘 올라오지 않았다. 교류가 없는 대다수의 sns 친구들에게 이미 나의 글 또한 스팸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5백여 분의 소통 가능한 sns 친구들만 남겨두고 과감히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것’이 유연성 있는 자유로움 같아 보이지만, 내게는 방임과 방종, 무성의와 무책임으로 느껴졌다.
교류 중인 분들과 스팸으로 받는 분들과는 선별하여 구분하는 것이 도리이고 상대에게 합당한 예의라고 생각되었다.
대략 2천여 명을 정리하던 중 작동이 중단되면서 나의 계정에 해킹이 의심된다며 인증요청이 왔다. 순간 당황하여 인증번호를 잘못 눌렀는데, 곧바로 계정이 잠겨버리고 말았다. ‘해킹이 우려되어 고객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잠근다고 하였지만 한 번의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다. 백방으로 노력을 해보았으나 sns 자체에 쌍방 소통의 기능이 전혀 없었다. 오직 기계적인 안내 문구만 있을 뿐이었다.
약소국의 회원을 식민지 백성쯤으로 인식하는 제국주의의 횡포에 분노가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어느 사이 sns의 자발적 노예가 되어버린 자신의 무력감을 극복하기는 더욱 힘든 노릇이었다.
2백여 개의 글들과 자료들, 무엇보다 5~6백 명에 달하는 sns 친구들과 4년여의 우정이 한순간에 포맷되어버리는 참담한 기분을 무엇으로도 형언할 수가 없다.
단단한 벽돌집 지으려다 초가삼간마저 무너트리고 만 격이 되어버렸다.
언젠가는 sns를 떠날 것이라 예견하고 있었지만, 인사조차 없이 이런 식으로 격리된다는 건 좀 잔인하지 않은가?
과거의 유배는 유배지의 ‘거리’가 매우 중요하였다. 죄의 경중에 따라 유배지의 거리를 달리했으며, 유배지의 거리가 멀수록 권력과의 소통은 멀어지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유배는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보’의 차단이나 ‘관계’의 단절에 있다. 십 여일 동안 나는 sns에 의해 위리안치의 형벌에 처해진 것이다.
온라인시대의 십여 일은 농경사회의 십여 년에 해당하는 오랜 시간이다.
절해고도에 홀로 남겨진 절대 고독 앞에서 비로소 나는 온전히 나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