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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沙溪) 김장생의 6세손으로 영조 때 대사간을 지낸 석당 김상정은 치재설(恥齋說)에서 “가장 좋은 것은 부끄러운 행실이 하나도 없는 것이요, 가장 나쁜 것은 부끄러운 행실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조차 아예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 하니 차마 부끄러워 고개 들 수 없는 일들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일이 열거하기 조차 민망하다.
일국의 지도자가 국제 회의장에서 내뱉은 말을 기억나지 않는 다거나 특정인을 향해 한 말이 아니라고 우긴다. 당시 상황이 딤긴 영상이 번연히 유통되고 있는데도 그렇다. 한술 더 떠 진상 조사를 해야 한다고 떠든다. 자신의 입이 발화점인데도 말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충성경쟁에 나선 수하들의 망나니 칼춤이다.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느니, ‘발리면’이라느니 누가 더 충신인가를 경쟁하듯 국민의 눈과 귀를 속이려 든다.
문명사회, 백주 대낮에 이 무슨 해괴한 짓들인가. 참으로 눈 뜨고는 못 볼 목불인견의 아수라장이다.
석당 선생 말처럼 자신의 잘못된 행실에 대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국민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도리인데도 되레 큰소리다. 최초로 유포했다는 이유로 특정 언론만 다그친다. 도둑이 매를 든 격이다. ‘바이든’으로 들은 국민들은 뜬금없이 난청 환자가 된다.
사회를 어지럽히는 혼군의 부끄러운 행실 탓에 세상은 불의가 판을 치고 진실과 정의가 부정되고 있다. 시절이 이처럼 하수상해서 일까?
요즘 부쩍 김주열 열사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머릿속에 어른거린다. 주지하다 시피 1944년 남원시 금지면에서 태어난 김 열사는 62년 전인 1960년 3월 15일 마산의 시민 학생들과 함께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투쟁 중 경찰들이 쏜 최루탄에 맞아 사망했다. 김 열사는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쇠사슬로 두 다리를 묶고 쇳덩어리를 매달아 마산 앞바다에 던져 수장해버림으로써 시체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근 한 달만인 4월 11일에 최루탄이 눈에 박히고 두 다리가 쇠고랑에 감기고 쇳덩어리를 매단 김 열사의 시체가 마산시 신포동 앞바다에 떠올랐다. 겨우 17세인 고등학교 1학년 입학생이 이러한 처참한 죽음을 당한 것이다.
이에 학생들을 선두로 한 마산 시민들이 김주열을 외치며 다시 들고 일어나 시위가 들불처럼 크게 번지자, 서울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3.15부정선거 규탄, 선거 무효, 이승만 독재 퇴진 투쟁이 더욱 거세게 타올라 4.19 혁명으로 이어졌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하고 미국으로 망명하는 역사적인 대변혁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 열사의 시체가 4월 혁명의 뇌관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된 것이다.
하지만 암울했던 시기, 몸을 던져 민주화 시대를 열었던 김 열사의 의로운 정신이 국민들의 뇌리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어 안타깝다.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고향인 남원시 금지면에 추모관이 세워졌지만 매년 4월이면 반짝하다 잊혀지곤 한다. 추모관 안에는 김 열사의 사진과 그가 살아온 기록들이 전시돼 있다.
묘지에는 ‘金朱烈之墓’ 비석과 ‘열사 김주열의 묘’라고 한글로 새겨진 묘비석이 있고 깨긋하게 관리된 묘비에는 김 열사가 민주화에 기여했다는 공적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역사의 물결을 돌렸던 김 열사의 고귀한 뜻, 숭고한 정신을 생각하면 예우와 대접 등이 크게 미흡한 것 같아 아쉽다. 역사적 인물로만 박제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불의하고 부정의하고 불합리한 요즘같은 혼란스런 시대 상황에는 김 열사의 정신과 뜻이 시민들의 마음을 흔들어 깨어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과거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다.
굳이 이 말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일년 중 4월 특정일에만 추모하고 끝나는 반짝 행사에 그쳐서는 안된다. 김 열사의 고귀한 희생으로 열렸던 민주주의를 굳건히 지켜 나가고 그의 뜻과 얼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서는 4.19 관련 학술행사와 추모음악회 등 다양한 방식의 이벤트가 그의 고향, 남원에서 연중 릴레이로 펼쳐져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후세들이 김 열사의 뜻과 얼을 이어가는 최소한의 도리요, 예의가 아닐까 싶다.
/최준호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