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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격언에 ‘도서관 하나가 생기면 교도소 하나가 없어진다’는 게 있다. 책의 효용을, 위대한 힘을 잘 설파한다.
우리나라 출판인 중에서 고인, 생존인을 통틀어 출판계에 가장 공이 큰 분이 누구일까? 몇몇 분들이 떠오른다. 한길사 김언호 사장(77)도 분명 후보 중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를 하다 1975년 그 저명한 '동아투위'(동아일보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사건으로 만 30살이던 1975년 3월 신문사에서 쫓겨났다.
패기와 열정이 가득할 때라 곧 복직되겠지 싶어 잠시 다른 매체에 가 있자는 생각에 75년 10월부터 딱 1년 주간지에서 일했지만 동아일보 복직 가능성은 점차 멀어져갔다. 박정희 유신정치의 발악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아투위 대(對) 동아일보 및 정부간 싸움은 갈수록 격렬해 졌다.
생활도 할 겸 할 수 있는 생업을 떠올리다 출판사 설립을 결심했다. 7년여 기자생활 경험의 도전의식도 있었거니와 무엇보다 자신이 책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평소 읽고 싶던 책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해서 1976년 12월 크리스마스 전날 태어난 게 한길사. 이름도 스스로 지었다. 한길, 큰 길, 광장, 한눈 팔지 않는 길, 정의로운 길 등 다양한 뜻으로 풀이되는 이름이었다. 한길사는 설립 후 46년이 다 돼가는 최근까지 약 3,500종의 책을 내 이 방면에서 국내 톱 클라스에 올라있다.
한길사의 책에는 이 땅의 역사를 바꾸고, 시대정신을 일구었으며 사람들의 뇌리에 청천벽력 같은 충격과 사고의 대전환을 준 이른바 '킬러 북'들이 즐비하다.
한길사를 스타덤에 올린 딱 한 권의 책을 꼽으라면 상당수 한길사 팬들은 아마 리영희 선생의 '우상과 이성'(1977년)을 들 것이다. 그리고 시리즈를 꼽으라면 주옥같은 책들로 꾸며진 '오늘의 사상신서'가 아닐까 한다.
1977년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오늘의 사상신서'는 송건호, 리영희, 박현채, 고은, 강만길 등 당시로서는 최고로 역사의식 가득한 '진보적 작가'들을 모두 포용하며 문제작, 화제작들을 연속으로 내 초기 신생 출판사였던 한길사 정립에 큰 힘이 됐다.
제1권 '한국민족주의의 탐구'(송건호), 3권 '우상과 이성'(리영희), 5권 '민족경제론'(박현채)등이 잇달아 나오면서 유신치하 지식인사회의 갈증에 젖줄이 되었다. 드디어 11권에 '해전사'라는 약칭으로 더 유명한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출간되면서 한길사는 지식인과 의식있는 대학생들의 뗄 수 없는 친구가 된다. 역작으로 점철된 '오늘의 사상신서'는 현재까지 172권에 이르고 있다.
이후 인류의 지적 유산을 집대성하기 위해 기획한 '그레이트북스', '한국사 이야기'(이이화), '혼불'(최명희), 그리고 '아동문학전집' 등이 연거푸 큰 성공을 거두자 김 사장에게는 '출판계의 마이더스의 손'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운도 따랐다. '우상과 이성'은 나오자마자 저자가 구속되는 필화사건이 벌어져 유명해졌고 '민족경제론'과 '해전사' 또한 출판 즉시 판금이 되면서 유명세를 치렀다.
79년 10.26 박정희 시해사건과 80년 5월 민주화항쟁은 한길사의 폭풍성장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책은 겨울 얼음장을 뚫고 나오듯 뛰쳐나와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
한길사의 맹렬한 속도전은 계속되어, 1981년에는 <한길세계문학>을 발간했고, 1986년에는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이 선보여 대성공을 기록했다.
이어 1994년에는 앞서 언급한 22권짜리 대작인 이이화 선생의 <한국사 이야기>가 간행되었고, 1995년에는 낙양의 지가를 올린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태어나 전설을 쌓아갔다. 이듬 해인 1996년에는 최명희 작 <혼불>이 출간되어 우리 말의 극강의 아름다움과 섬세하고 다양함을 깨우치게 해주었다.
그 사이 한국사상사의 대가들인 함석헌, 리영희, 송건호 선생의 저작을 종합해 전집을 간행하는 한편, 소년들을 위한 출판에도 눈을 돌려 '소년한길 토마토하우스'라는 소년전문서적 출판사를 독립시키고, <끄 쎄-즈>(Que sais-je ?, 내가 뭘 알지?)라는 시리즈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출판사의 융성으로 많이 바빴지만, 그는 1998년 '한국출판인회의'를 창설하고 제1, 2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부터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조직해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80년대 후반부터는 파주출판도시 건설에 참여했다.
다시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남북한이 대치하는 파주에 예술인마을 헤이리를 구상하고 건설하는 데 앞장섰고,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도 역임했다.<계속>
/김기만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청와대 춘추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