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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의 사전적 의미는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이다.
‘포기’는 ‘하려던 일을 도중에 그만두어 버림’ 또는 ‘자기의 권리나 자격, 물건 따위를 내던져 버림’이다. 두 단어가 ‘단념하다’라는 의미에서는 모두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만, 그 어원을 살펴보면 속뜻은 사뭇 양상이 다르다.
‘포기(抛棄)’라는 단어의 ‘抛’와 ‘棄’는 모두 ‘던지다’, ‘내버리다’, ‘그만두다’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포기는 권리나 자격 등의 지위를 버린다거나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둔다는 뜻으로 쓰인다.
한편 ‘자포자기(自暴自棄)’라는 말의 의미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세상사에 절망하여 자기를 부정하다’라는 정도로 이해하고 있지만, 이 말의 어원은 맹자에 있다. 맹자가 처음 주장했던 ‘자포자기’의 의미는 “예의를 비난하거나 도덕적 인간이 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뜻하였다.
言非禮義, 謂之自暴也. 吾身不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포기'가 '자포자기'에서 나온 말로 오인할 수도 있겠으나 이 둘은 그 어원의 출발이 다르다.
‘체념(諦念)’이란 낱말의 ‘諦’ 자는 ‘살피다’, ‘조사하다’, ‘명료하게 알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체념의 원뜻은 살피고 염려해서 이치를 깨닫는 마음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 함축적 의미는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다.
그러므로~, 체념은 나를 ‘주어’로 삼는 것이고, 포기는 나를 ‘목적어’로 삼는 것이다. 체념은 자신의 도리를 온전히 알고 ‘내가 결단하는 것’이요, 포기는 자신의 처해 진 상황을 알고 ‘나를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기는 ‘능력’에 관한 문제이고 체념은 ‘도리’에 관한 문제이다. 포기는 자신의 ‘목적’을 버리는 행위이고, 체념은 자신의 ‘욕망’을 버리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포기는 학습하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되지만, 체념은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인내와 수양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다윗이 말했던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라는 고백은 ‘포기’가 아니라 ‘체념’인 것이다. 갈등과 진통의 과정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욕망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는 행위인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자신의 한계를 온전히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이다.
개발 독재 시대에 ‘하면 된다’라는 구호가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허다하고 ‘해서는 안 되는 일’도 존재한다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욕망을 절제하여 체념할 줄 모르고 나의 욕망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인가?
그러므로~, 진정한 겸손이란 ‘포기’할 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체념’할 때 나오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갈등과 번뇌의 뿌리에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여 ‘금욕(禁欲)’을 주장한다. ‘삼법인’, ‘사성제’가 모두 근원적으로 ‘無’와 ‘空’의 사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세상은 오직 ‘괴로움의 바다[苦海]’일 뿐이며, 인간 자체는 ‘슬픔을 담은 존재[悲器]’라고 여기는 것이다. 성철스님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딸의 이름조차 ‘不必’이라 하였다.
불가의 궁극적 목표는 ‘윤회’가 아닌 ‘업장소멸’에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이 땅에서의 삶을 철저히 부정하는 것이다. 이는 ‘극단적 허무주의’이다.
도가에서는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인위적 행위 자체를 부정하며 ‘무욕(無欲)’을 주장한다. 우주와 인간의 상호작용 속에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는 ‘무위자연’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공자 또한 말하기를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이라 하였다. 즉 인간은 새와 짐승과는 무리 지어 함께 살 수 없으며, 사람이 사람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라고 하였다.
노장사상은 인간사회의 모든 공동체적 질서와 유기적 체제를 인간의 본성을 구속하는 작위적 속박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는 ‘낙천적 허무주의’이다.
유가에서는 인간의 욕망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내면의 수양을 통해서 인간의 욕망을 절제할 수 있다고 믿으며 ‘절욕(節欲)’을 주장한다. 성리학에서는 ‘심통성정(心統性情)’이라 하였다. 즉 마음이 ‘性’과 ‘情’을 통괄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회복 되어질 때 욕망을 절제할 수 있으며, 자신의 사적 욕망을 극복해낸 결과물이 바로 ‘예의 회복[復禮]’이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목적론적 인생관’이라는 가치가 정립된 이후 인간의 행복을 정의하는 다양한 사조가 생겨났다. 키니코스학파는 ‘무소유’를 참다운 행복이라 정의하였으며, 스토아학파는 행복은 외부의 소유가 아니라 내면의 자유에서 생겨난다고 여겨 ‘不動心’을 주장하였다. 또한 에피크로스학파는 ‘행복에 이르는 길은 성취를 키우기보다는 욕망을 줄이는 데 있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욕망을 다스릴 능력이 있는 것일까?
나의 사적 견해로 ‘금욕’이나 ‘무욕’은 인간의 실천이 불가능한 영역이라 생각된다. 오직 ‘절욕’만이 실현 가능한 영역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관념의 세계에 머물기가 십상이다. 그렇다면 욕망을 절제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나의 삶 속에서 어떻게 구현해 내야 하는가?
인간이 언제든 자신의 욕망을 비우고자 한다면, 그 첫걸음은 반드시 ‘체념해야 할 것’과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별하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