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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란 없다는 것의 변론 - 無命辯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마땅히 그래야 해야 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의(義)’이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명(命)’이다.

성인은 ‘의(義)’로 말미암았지만 ‘명(命)’이 그 가운데 있고 군자는 ‘의(義)’로써 ‘명(命)’에 순종한다. 보통사람 이상은 ‘명(命)’으로서 ‘의(義)’를 단정하고 보통사람 이하의 사람은 ‘명(命)’을 알지 못하고 ‘의(義)’도 잊는다.

이 때문에 ‘명(命)’을 알지 못하고서 ‘의(義)’에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고, ‘의(義)’에 통달하지 못하고서 ‘명(命)’에 편안할 수 있는 사람은 있지 않다.

그러나 ‘명(命)’은 때때로 말을 하지 않지만, ‘의(義)’는 가는 곳마다 행하지 않을 수 없다.
- 當然而然者, 義也; 莫之然而然者, 命也. 聖人由義而命在其中, 君子以義順命. 中人以上, 以命斷義; 中人已下, 不知命而忘其義. 是以, 不知命而能安於義者, 鮮矣, 不達於義而能安其命者, 未之有也. 然, 命有時而不言, 義無往而不行.

‘명(命)’이란 알 수는 있어도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명(命)’이란 믿을 수는 있어도 꼭 그렇게 되기를 기약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째서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하는가?

‘무위(無爲)’한 것은 하늘이요, ‘유위(有爲)’한 것은 인간이니, ‘명(命)’이란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하늘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째서 믿을 수는 있지만, 꼭 그렇게 되기를 기필할 수는 없다고 하는가?

그렇게 되기를 기필할 수 있는 것은 ‘이치(理致)’이고 그렇게 되기를 기필할 수 없는 것은 ‘일(事)’이다.
-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의 「무명변(無命辯)」 중에서

하늘이 명령하여 천도(天道)를 만물에 부여한 것이 ‘성(性)’이다. 이 천명을 따르는 것이 ‘도(道)’이다. 이 하늘의 도리(道理)를 올바르게 닦는 것을 ‘교(敎)’라 한다.
-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
너무나 유명한 『중용(中庸)』의 정언 명령이다.

천명(天命)’과 ‘솔성(率性)’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개선할 수 있는 영역은 오직 ‘수도(修道)’에 있다.

‘수(修)’하지 않아도 되는 ‘도(道)’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 세상에 노력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도(道)’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도(道)’는 영원히 ‘수도(修道)’의 대상인 것이다.

‘수도(修道)’를 일러 ‘교(敎)’라고 한다. 현재 우리가 제도권에서 시행하는 교육은 자연의 영역이 아닌 문화의 영역이다. 노자는 도를 자연(自然)으로 이루어지는 ‘무위(無爲)’의 영역이요 본성에 따른 ‘존재(存在)’의 영역으로 규정하였지만, 우리에게 절실한 현대적 의미의 도는 교육을 통한 ‘유위(有爲)’의 영역이요 수양을 통한 ‘당위(當爲)’의 영역인 것이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생존의 경쟁을 통한 실천적 삶의 의지를 체험해 보지 못한 관념적 철학은 언제나 ‘필드에 대한 존경심’을 상실하는 우를 범하기 마련이다. 나는 세상의 모든 진리가 중용에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인류의 집단 지성이 검증해온 사상의 결과물일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과 내면세계에 대한 철학적 균형감각이 가장 온전하게 구현된 위대한 사상 체계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한비자는 ‘인성호리(人性好利)’설을 주장하였다.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는 말이다. 동물의 세계에 이타적인 양심이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 또한 나면서부터 이타적인 인간은 아무도 없다.

사람은 모두 ‘이기(利己)’에서 출발하여 ‘지기(知己)’에 이른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은 이 과정을 넘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지기(知己)’를 넘어 ‘극기(克己)’의 단계에 이르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부터는 이타적 인간형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아주 드물게는 ‘극기(克己)’의 단계를 초월하여 마침내 ‘성기(成己)’의 세계에 진입하는 존경할만한 위인도 있다.

‘심재(心齋)’니, ‘좌망(坐忘)’이니, ‘상아(喪我)’니, ‘현해(懸解)’니 하는 실체가 없는 문학적 상상력에 불과한 수사학적 언어유희를 마치 구원에 이르는 수양의 도구인 양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장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정의를 구현하기보다는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 ‘영원한 진실’의 문제를 추구한 것이었을 뿐, 사회 공동체의 공화(共和)나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이미 이천 오백 년 전 공자는 ‘노장(老莊)’을 이단으로 규정하며, ‘조수불가여동군(鳥獸不可與同群)’이라 하였다. 사람은 새와 짐승과 더불어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 존재라는 말이다.

사회의 유기적 기능은 ‘무위(無爲)’를 통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한 ‘유위(有爲)’의 인위적 노력의 결과물로서 성장해 가는 것이다.

나는 동서양의 어떤 종교적 사상이나 철학적 사변이든지 간에 ‘빵의 문제’와 ‘인간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관념 철학이나 메타포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레토릭을 단호히 거부한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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