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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容)’은 집 면(宀) 자에 골짜기 곡(谷)을 더한 글자이다. ‘곡(谷)’은 계곡의 입구를 형상화한 것이다. '용(容)'의 본뜻은 사람과 가재도구 등을 수용하는 ‘집’과 낮은 곳에서 계곡의 물을 수용하는 ‘골짜기’의 이미지를 유추하여 ‘받아 들이다’를 본뜻으로 삼은 것이다.
금문의 자형에는 ‘內’(안 내)와 ‘口’(입 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內’를 納(들일 납)으로 보고 ‘口’는 그릇의 입으로 유추하여 ‘어떤 물체를 용기에다 넣는다’라는 의미를 형상화한 글자로 보기도 한다.
어쨌거나 ‘용(容)’의 원래의 뜻은 ‘담다’, ‘수용(收容)하다’의 의미에서 시작되었다.
‘서(恕)’는 같을 여(如) 자에 마음 심(心)을 더한 글자이다. ‘여(如)’ 자의 ‘여(女)’는 다소곳이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아니라 묶인 채 꿇어앉은 전쟁포로의 상형이며, ‘구(口)’는 실정대로 털어놓는 말을 의미한다. 라고 주장하는 설도 있고 ‘말(口)을 잘 따라야 하는 여인(女)’, 즉 순종적 존재로서의 여성의 입에서 본뜻을 추출했다고 주장하는 설도 있다.
어쨌거나 허신의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여(如)’의 의미를 ‘종수(從隨)’. 즉 ‘따르다’, ‘같다’의 의미로 풀이하고 있다. 그래서 “‘서(恕)’는 ‘마음(心) 가는 대로(如) 하다”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용서(容恕)’는 속에 어떤 것이라도 들어올 수 있도록 마음을 비우는 것이요, 그 비워진 마음(心)이 시키는 대로(如), 그 마음이 가는 대로 하는 것을 말한다.
최근 산적 친구들과 함께 북한산에 올랐다. 난생처음 비봉, 향로봉, 족두리봉, 사모바위 등을 등반하였다.
‘비봉(碑峰)’은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가 있어서 붙여진 명칭이고 ‘향로봉(香爐峰)’은 탕춘대성 방향에서 바라보면 향로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며 ‘족두리봉’은 보이는 대로 족두리 모습 같아서 붙여진 명칭이라 한다. ‘사모봉’은 누군가를 사모하는 ‘사모(思慕)’인 줄 알았으나 사모관대의 사모(紗帽)에서 유래하였다 한다.
산에 올라 세상을 바라보니, 마치 세상의 군상이 개미굴과 같이 작고 하찮게 보였다. 멀리 일산 김포까지 전망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소에 거실 창문으로 아련하게만 보이던 북한산 정상에 지금 내가 서 있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을 정도로 신기하였다.
개미굴같이 작고 하찮게 느껴지는 세상을 내려 보노라니, 문득 백거이의 ‘대작(對酌)’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 술잔 마주하고
달팽이 뿔같이 조그만 땅에서 무슨 일로 다투는가?
부싯돌 불빛 같은 찰나의 순간 속에 사는 인생인데
풍족하든 부족하든 이 또한 기뻐하여라
입 벌려 웃을 줄 모른다면 이는 어리석은 사람이지
蝸牛角上爭何事, 石火光中寄此身.
隨富隨貧且歡樂, 不開口笑是痴人.
육십 년 전, 이 지구라는 별에 내가 오기 전에도 하늘은 푸르고, 맑은 흰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언제쯤일지 모르지만 내가 이곳을 떠난 후에도 태양은 여전히 빛나고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는 맑은 하늘 떠다니는 흰 구름을 보며, 삶과 죽음이란 무엇인가 고뇌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세인 중에는 백거이처럼 초연한 인생이 나올 수도 있을 것이다.
난들 또 백거이처럼 인생을 초연하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법이 있더란 말인가? 마음에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용서’하기로 하였다. 공적인 일이야 내 영역 밖의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사적인 개인 간의 일들은 모두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새로 담겨질 두려움 섞이고 떨리는 일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을 청춘인데, 굳이 미움과 원망을 이고 지며 살아야만 할 까닭이 있을까?
‘서(恕)’를 주자(朱子)는 ‘추기급인(推己及人)’이라 하였다. 즉 자기를 미루어 남에게 미친다는 뜻으로 자기의 처지에 비추어 다른 사람의 형편을 헤아린다는 말이다. 한자의 뜻과 같이 마음(心)을 같이(如)하는 것이므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고자 하는 배려의 마음이다. ‘서(恕)’할 때라야 비로소 공감과 소통이 가능하게 된다.
오늘 내 마음에 ‘서(恕)’라는 꽃씨 하나를 심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