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이태원 참사' 한 달에 맞는 늦은 가을, 가을 詩

전 동아일보 파리특파원, 청와대 춘추관장 김기만 칼럼
일찍 일어나 문득 생각하니 나흘 후면 11월이 다 하고, 가을도 끝입니다. 그리고 29일이면 돌아보고 싶지 않은 이태원 참사가 한 달입니다. 사건 규명도, 어떤 책임자 인책도 없이 참사 한 달을 맞는 이게 정상적인 나라인지요.

대다수 국민이 집단 울화증, 화병에 걸려있는데 이 정부는 참 용감하다 해야 할지, 뻔뻔함의 극치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꼭 그 꼴입니다. 이 정권이 그렇게 강조하는 '상식', '공정'과 맞는지 경악할 뿐입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고, 잠도 잘 못 이루시는 분들께 가을에 맞는 짧은 시 몇 편을 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이석형 언론중재위원장(73, 법무법인 산경 대표) 선배는 평소 약 2백 편의 시를 외웁니다. 모임 끝 무렵 꼭 시 한 편을 낭송해 주시는데, 그렇게 멋지고 부럽더군요. 그래서 저도 노력해 보는데 두뇌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외우는 시가 아직 10편 남짓합니다.

# 짧고 멋진 시들.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는 프랑스의 노벨상 작가 쥘 르나르(Jules Renard)의 '뱀'(snake, 불어 Le serpent)입니다. 시 전문이 ‘너무 길다’(too long, 불어 Trop long)입니다.
함민복 시인의 시 '가을'도 촌철살인입니다.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울림이 있지요?

이경림 시인의 같은 제목 '가을'은 낙엽을 노래합니다.

사랑해 사랑해/바싹 마른 몸 동그랗게 말고/하늘 하늘 속으로 곤두박질치는/저 나뭇잎. 듣기만 해도 떨어지는 낙엽이 떠올라 좋습니다.

안도현 시인의 '가을 엽서'는 낙엽에서 인생의 철리(哲理)를 말합니다.

한 잎 두 잎 나뭇잎이/낮은 곳으로 자꾸 내려앉습니다/세상에 나누어 줄 것이 많다는 듯이/나도 그대에게 무엇을 좀 나눠주고 싶습니다/내가 가진 게 너무 없다고 할지라도/그대여/가을 저녁 한 때 낙엽이 지거든 물어보십시오/사랑은 왜 낮은 곳에 있는지를.

정호승 시인의 '귀뚜라미에게 받은 편지'는 이태원을 생각하며 한번 꺼이꺼이 울고 싶어지게 합니다.

울지 마/엄마 돌아가신 지 언제인데/너처럼 많이 우는 애는 처음 봤다/해마다 가을날 밤이 깊으면/갈댓잎 사이로 허옇게 보름달 뜨면/내가 대신 이렇게 울고 있잖아.

많이 알려진 짧은 시입니다만, 장석주 시인의 '대추'도 이 결실의 계절의 끝판에 다시 외워보고 싶습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태풍 몇 개/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

이태원 참사와 정치 상황에 분노와 조바심이 크실 분들에게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드립니다.

마음 속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인내를 가지라/문제 그 자체를 사랑하라/당장 해답을 얻으려 하지 말라/그건 지금 당장 주어질 순 없으니까/중요한 건/모든 것을 살아보는 일이다/지금 그 문제들을 살라/그러면 언젠가 미래에/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삶이 너에게 해답을 가져다 줄 테니까.

그렇습니다. 답은 결국 나옵니다.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아주 위대했습니다로 시작되는 너무 유명한 릴케의 ‘가을날’은 생략합니다.

지난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가 아니라 '농어민의 날'이었습니다. 어느 언론도 이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농민들은 지금 쌀값폭락과 농정실패에 항의하며 나락을 군청 마당에 부려놓고 항의하고 있습니다.

차옥혜 시인의 ‘쌀을 태운다’는 이런 농민의 분노를 웅변합니다.

1. 추곡수매 마당에서 쌀을 태운다/살을 태운다 뼈를 태운다 넋을 태운다/
2. 타는 쌀가마에 둘러서서/바위네 엄마가 영희네 아빠가 철수네 형이/눈물을 흘리는 것은/제 살, 제 뼈, 제 넋 타는 연기 때문이 아니다/아픔 때문이 아니다/제 몸에 불지르고도 타지 않는 노여움 때문이다.

오늘 마지막 시는 노동자 시인 박노해의 절창 '무엇이 남아'를 골라봤습니다. 주제어를 연결하는 기법의 멋진 시입니다.

힘들게 쌓아올린 지식은 사라지고 지혜는 남아/지혜의 등불은 사라지고 여명이 밝아오는 정의의 길은 남아/정의의 길은 사라지고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 길에서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은 남아/사람은 사라지고 그대가 울며 씨뿌려 놓은 사랑, 사랑은 남아.

# 가을 정취의 영화와 음악.
내친 김에 '남자의 계절'이라는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영화 너덧 편도 소개해 보겠습니다. 뉴욕의 가을(조앤 첸 감독), 레옹(뤽 베송), 제3의 사나이(캐롤 리드), 유리의 성(장완정), 번지점프를 하다(김대승), 8월의 크리스마스(허진호).
제 취향으로 가을에 들으면 좋은 음악입니다.

가을곡의 신이 된 ‘고엽’, 비틀스의 음반 러버 소울(Rubber Soul)중 ‘미셸’(Michelle)과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 슈베르트의 곡 ‘겨울나그네’, 모리스 라벨의 ‘거울:3, 바다 위의 작은 배’.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과 유재하 1집 전곡, 그리고 1980년대 듀오 '어떤 날'의 ‘그 저녁에’ 입니다. 이 곡의 가사는 이렇게 끝납니다.

"인생은 참 어려운 노래여라".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