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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등명 법등명 - 自燈明 法燈明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서울의 모 여고 교장이 된 동창을 만났다. 그 친구는 강남의 주목받는 대형교회 교인이었다. 교회 출석 40년 만에 장로가 되었다며 자신이 ‘교장’이 된 것보다 ‘장로’가 된 것을 훨씬 자랑스러워했다.

교인이 10만 명이 넘는 강남의 대형교회에서 장로가 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잘 아는 내게 그는 장로의 신분을 한껏 과시하고 싶었을 것이었으나 나는 매우 안타까운 표정으로 한마디 거들었다.

“아니 자네는 아직도 교회를 다니시는가? 목사도 4년이면 신학교를 졸업하는데, 그런 목사에게 뭘 배울 게 있다고 40년씩이나 교회를 다니시는가? 아직도 졸업할 때가 안되었는가?”

내게 격려와 응원을 기대했다가 불의의 일격을 당한 그 친구는 멋쩍게 계속 웃기만 하였다.

예수가 공생애를 실현한 기간은 3년이었다. 제자들이 예수의 문하에서 그를 추종하던 기간 또한 3년뿐이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후 그들은 각자 자신의 삶의 영역에서 독립된 신앙 인격체로 살아갔다.

부처는 자신의 마지막 설법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자신을 등불로 삼아 밝히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밝혀라”
自燈明, 法燈明

‘자신을 등불로 삼아 밝히라’라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라는 말씀이고 ‘진리를 등불로 삼아 밝히라’라는 것은 진리를 의지하란 말씀이다.

자신을 의지하라는 것은 ‘자신의 마음만 믿고 의지하면 된다’라고 하는 이해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등불을 밝혀서 내면의 허물과 오류와 번뇌와 어리석음을 깨달으라는 말씀일 것이다.

임제 선사의 유명한 일화로 ‘살불살조(殺佛殺祖)’라는 말이 있다. ‘부처를 만나거든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거든 조사를 죽이며,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라는 소리이다. 이 화두에서의 살인은 육체적인 생명의 살인이 아니다. ‘우상’으로 떠받드는 부처와 조사, 무명(無明)이라는 아버지와 애착(愛着)이라는 어머니를 죽이라는 정신적, 인격적 살인이다. 한마디로 ‘우상 타파’인 것이다.

나를 얽매이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부수어버리라는 뜻이며 종교적 권위로 만들어진 우상을 버리지 않고서는 진정한 자유와 해탈을 이룰 수 없다는 의미이다.

제자에게 있어 스승은 자신의 행로를 규율하는 ‘고삐’가 아니라 도약을 위한 ‘발판’이어야 한다. 교육의 목적은 ‘모범적인 학생’을 만들어 내는 데 있지 않다. 교육의 참된 목적은 ‘착한 학생’을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좋은 스승’을 만들어 내는 데 목표를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때가 되면 제자는 반드시 스승을 떠나야 한다. 제자가 떠나지 않는다면 스승이 떠나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다.

들어오는 학생을 가두기만 하고 졸업을 시키지 않는 학교가 있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학교이거나 학생을 지적 장애인으로 전락시키는 수용소에 불과하다. 교회 또한 가두리 양식장이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가두기만 하고 졸업시키지 않으며 죽을 때까지 울궈먹기만 하다가는 집단 폐사하고 말 것이다.

교회는 종교시설에 불과하다. 종교시설이 크고 좋다고 하여 훌륭한 신앙을 갖는 것은 절대 아니다.

교회는 교인 수의 숫자 불리기로 세속적 권력을 구가하려는 맘모니즘에서 벗어나야 한다. 참된 교회는 교인 스스로가 목사나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의 ‘독립적 사고’와 ‘독립적 믿음’을 갖고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모이는 교회’에서 세상 속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깨달음이란 자신을 붙들고 있는 우상을 부수고 나오는 ‘존재의 변화’이다. 삶과 구체적으로 접목되는 관계를 떠나 있는 종교는 관념이고 허상일 뿐이다. 학문도 신앙도 의존적이거나 주술적인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 깨달음이나 구원은 궁극적으로 스스로 이루어 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는 선사들의 간곡한 가르침이다.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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