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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 이웃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구세군의 자선냄비와 요령 소리가 정겨운 계절이다. 이 소리가 마치 세상을 향한 알람시계처럼 파동이 되어 연말이 되었음을 깨닫게 하고, 한편으로는 여전히 우리의 곁에 어려운 이웃이 있음을 생각나게 한다. 과연 ‘불우한 이웃’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일까? 행여 가정경제가 어려운 사회적 약자나 지체가 부자유한 장애인 또는 곤경에 처한 불행한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불우’의 한자어는 ‘不遇’이다. 문자적 의미로는 ‘만나지 못했다’라는 말이다. 만남이라는 뜻을 가진 ‘우(遇)’자에는 다양한 형태의 만남을 내포하고 있다. 누군가를 우연히 만나는 ‘조우(遭遇)’ 기이한 인연으로 만나는 ‘기우(奇遇)’ 어떤 조건 아래의 상황으로 만나는 ‘경우(境遇)’가 있다. 또한 ‘우(遇)’자는 ‘만나다’라는 뜻 외에도 ‘예우하다’, ‘대접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이는 누군가를 만났을 때 상대에 대한 예를 갖춘다는 의미이다. 훌륭한 인물을 예로써 대하는 것이 곧 ‘예우(禮遇)’이다.

그렇다면 ‘불우’는 도대체 누구를 만나지 못했다는 말인가? 부모나 스승, 친구나 애인을 말하는 것일까? 이 말의 속뜻에는 ‘천하를 다스릴 경륜이 있는 사람이 임금을 만나지 못했다.’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불우라는 말의 어원은 ‘회재불우(懷才不遇)’의 준말로서 중국 서한 때 가의(賈誼)가 쓴 『신서(新書)』에서 유래하였다. 즉 재주를 품고 있지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음을 이르는 말이다. 이 불우의 대표적 예가 바로 ‘기복염거(驥服鹽車)’이다. ‘천리마가 소금 수레를 끈다.’라는 의미로서 뛰어난 인재가 재능에 맞지 않게 보잘 것 없는 일을 하고 있음을 일컫는다. 천리마에게는 자신이 명마임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곧 ‘백락(伯樂)’을 만나지 못한 것이 ‘불우’한 상황에 놓이게 된 셈이다.

자고이래로 세상에는 언제나 불우한 이웃들로 넘쳐난다. 두보와 이백이 그랬으며, 신라의 최치원과 조선의 김시습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천재적 재능과 탁월한 경륜을 갖추고도 하늘의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특별히 최치원은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18세에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에 장원 급제한 특출난 인물이었으나 6두품이라는 신분의 한계에 막혀 자신의 경륜을 펼쳐보지 못한 비운의 인물이다.

‘불우한 사람’이 때를 기다리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면, ‘불쌍한 사람’이란 때를 만나고도 준비가 되지 않아 세상에 쓰임 받지 못하여 그 기회가 무용지물이 되고 만 사람이다. 또한 ‘불행한 사람’이란 천명에 순응하지 못하고 역행하는 역천자(逆天者)이다. ‘때를 놓친 봉황은 닭보다 못하다.’라는 속담처럼 하늘의 때를 알지 못하여 천재일우의 기회를 날려버린 사람이다.

요즘 ‘빈곤 포르노’란 말이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절대권력을 거머쥔 자의 부인이 캄보디아에서 심장병 아동과 찍은 사진을 두고 하는 말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는 선의의 발로라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니체는 거지에게 베푸는 동정의 감정을 경계한다.

‘동정’은 동정하는 나에게도, 상대에게도 무익하다고 주장한다. 동정을 베푸는 자는 희열을 느낀다. 남의 고통에 견주어 자기 삶에 감사하게 된다. 나의 은총이 타인의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는 오만을 갖는다. 은총과 자비를 베풀면서 우월감과 승리감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동정은 세상의 고통을 가중시키며 인간을 왜소하게 하는 유해한 충동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불가능에 가깝다. 누구를 동정해서 돕는다는 것은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니체는 마구잡이식 선행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만족을 위한 배설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도움을 주려거든 생면부지의 타인이 아닌 자신의 친구를 도와주라는 것이다.

친구라는 것은 ‘동일한 고뇌와 동일한 희망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의 고통을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본성상 최상의 것을 자기에게 주려고 한다. 그렇게 구성된 존재가 지금의 나다. 내가 나를 돕는 방식, 그 방식으로 친구를 도와주라고 말하고 있다. 친구 아닌 자에게 예컨대 거지에게 무엇을 베푼다는 것은 위선이거나 자기기만일 수 있다.

나는 그를 모르고, 그의 고뇌를 모르며, 총체적으로 그를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를 동정해서 무상으로 무엇을 베푼다면 그때 나는 우월감을 느끼지만 거지는 모멸을 삼켜야 한다. 표현할 수 없는 모멸, 이것은 주는 자도 받는 자도 병들게 한다. 일종의 질환인 셈이다. 니체는 주장하기를 “동정을 베풀려거든 먼저 친구가 되어라. 당신이 베푸는 자가 되고 상대가 수혜자가 되는 동정의 관계는 질환이며 악행이다. 친구가 아닌 경우는 절대로 돕지 마라”고 하였다. 기울어진 관계에서의 동정은 폭력이다. 그러므로 돕기 전에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친구에게 적절한 것인지 좋은 것인지 헤아려 본 후, 내다 버리듯 주어야 한다. 필요 없어서 주는 것처럼, 그래서 그가 미안해 하지 않고 즐겁고 당당하게 받도록 해야 한다.

대한민국 어느 권력자의 부인이 자신의 이미지를 세탁하고자 유명 배우들의 선행을 표절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그녀가 간과한 사실은 오드리 헵번과 안젤리나 졸리, 김혜자와 정우성 등은 오랜 세월 그들과 친구로서 우정을 맺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불쌍한 아동을 동정의 대상으로 묘사하고 그의 고통을 전시하며 상대의 불행을 볼모로 나의 선행을 홍보하겠다는 것은 놀부가 제비의 다리를 부러트려 박씨를 얻겠다는 것과 똑같은 발상이다. 이런 유치하고 위선적 발상으로는 자신의 과거 부정적 이미지를 세탁하기에 역부족이다. 동양적 불우 이웃 돕기가 자활의 길을 열어주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라면, 서양적 불우 이웃 돕기의 핵심은 그와 진정한 친구가 되는 것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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