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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간에 대한 철학적 견해들
그러나 일반상대성이론은 ‘주어진’ 시공간이 어떻게 구부러지는가를 기술할 뿐, 시공간이 어떻게 탄생했는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 후의 물리학자들은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을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비로소 시간의 실체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20세기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꽃을 피운 시대였고, 물리학자들은 위대한 두 이론을 통합하려고 하고 있으나 아직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한마디로 우리는 아직 시간의 물리적 실체를 알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과학자들의 시간 개념에 반대되는 견해는, 시간은 사건이나 사물이 움직여 지나가거나 어떤 물체가 흘러 지나가는 어떤 그릇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순서를 정하고 사건들을 비교하는, 기본적으로 지적 구조(공간과 숫자와 함께)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 두번째 견해는, 라이프니츠(1646-1716 독일 철학자.정치가.외교관) 와 칸트(1724-1806 독일 철학자)의 전통에 따라서, 시간은 사건이나 사물이 아니고 그 자체로는 측정될 수 있거나 주행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뉴톤은 절대적 공간과 절대적 시간의 존재를 믿었고 라이프니츠는 시간과 공간은 상대적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시간에 대한 물리적 해답이 아직 완전하니 않으니 이에 대한 이해는 철학적 성찰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아 철학자들의 분석을 살펴보며 이를 단순화해서 정리해 본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시간(공간이라는 다른 선험적 직관과 함께)을 감각경험을 이해하도록 해주는 선험적 직관이라고 기술했다. 베르그송(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927년 노벨문학상)은 시간은 실재적인 균일한 매체로서, 정신적 구성개념이 아니며, 지속이라고 보았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지속은 현실의 필수적 요소인 창의성이며 기억이다. 베르그송은 고대 그리스 철학의 목적론이나 근대 서양철학의 인과론이 모두 시간을 제거하고 세상을 절대불변하는 공간으로 파악하려고 했다고 하면서, 이러한 전통철학의 세계관을 거부하고 지금껏 배제되었던 ‘시간’을 철학 안으로 데려온 것으로 평가된다.
그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 시간, 학문상의 시간은 공간화된 시간이다. 즉 시간 자체를 나눈 것이 아니라 공간을 나눈 것이며 이것은 곧 물리적 시간이다. 시계는 시간을 공간으로 나눈 대표적인 물건이다. 물리적 시간은 무수하게 분절되어 있으므로 연속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은 사물의 질적 변화를 설명해 주지 못하며 단지 양적 변화만을 보여줄 뿐이다. 베르그송은 과학에서 다루는 시각과 구별하기 위해 자신이 말하는 시간을 ‘지속’ 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지속은 무언가가 계속되지만 질적 변화를 내포한 지속이다.
그에 의하면 지속이야말로 참된 실재이다. 이 실재는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질료의 물자체 처럼 움직이지도 변하지도 않는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생성, 움직임이 지속되는 것으로서의 ‘지속’이다. 즉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지속되는 지속이다. 그리고 지속은 오직 ‘직관’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다.
직관은 감각, 경험, 추리 등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않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말한다. 지성은 직관과 반대된다. 지성은 합리적 사고를 특징으로 하며 실용적이다.
그러나 합리적 사고는 사물의 의미나 인간의 삶에 다가가기에 적합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비합리적, 예측 불가능성으로 가득 찬 곳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의 직관은 삶과 하나가 되는 앎에 가깝다.
직관은 사물 안으로 들어가 내가 곧 사물이 되는 공감이다. 공감은 나 라는 한정된 주체에서 벗어나 무한한 세계로 나아가게 해준다.
존재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지성이 아닌 직관만이 할 수 있다. 사람을 지성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공감할 수 없다.
이성만으로 이 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세상에는 셀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존재의 속성이 있고 그것은 지속과 직관을 통해 드러난다. 우리는 지속과 직관을 통해 세계를 진정으로, 직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지속이란 곧 창조이다.
그의 철학에서 시간은 ‘지속’ 이라는 개념이 되어 끊임없이 운동하는 생명의 본성을 설명한다.
그리고 지속은 생명의 폭발하는 힘, 질적 도약인 엘랑 비탈‘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창조해 나간다. 이렇듯 시간을 매개로 한 창조가 베르그송이 전통철학과 단절하는 계기가 되며 세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야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정적이며 고정화된 것을 다루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동적인 흐름을 파악할 때는 지성은 이를 정적 요소의 한 연속으로 환원시켜 버린다. 지성은 예를 들면, 시간을 표준단위에 의하여 측정할 수 있는, 평면상의 등질적 직선과 같은 존재로 파악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하는 시간은 이질적인 과정의 구체적이며 불가분한 것의 연속이다. 지성은 행동을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지만, 직관은 그와 같은 목적과 이해를 갖지 않으며, 다만 대상의 내면에 깊이 파고 들어 절대적인 지식을 우리에게 준다.
지성의 산물인 자연과학은 지성의 모든 한계를 지니고 있으므로, 직관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이 지속.생성.진화를 파악하여 그것으로써 과학을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한다는 것은 변화한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은 성숙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변화는 성숙하는 쪽으로의 바뀜만을 뜻한다. 뭔가를 이루고 예전보다 무르익는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변화라고 부를 수 있다.
“성숙한다는 것은 자신을 무한히 창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뭔가를 이루고 무르익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움에 도전하고 창조해야 한다. 그에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베르그송은 직선적이지 않은 주관적 시간의 인지를 직선적이고 측정할 수 있는 시간의 연대기와 구별한다.
지속에서는 과거는 간단히 사라지지 않으며 연대기적 시간처럼 상실되는 것도 아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