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이데거(1889-1976 독일 철학자)에 의하면 우리는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시간이다. 따라서 과거에 대한 관계는 있었던 것에 대한 현재적 인식이다. 이는 과거를 현재에 존재하도록 해준다. 미래에 대한 관계는 잠재적 가능성, 작업 또는 참여를 예견하는 상태이다. 이는 장차 일어날 일을 생각할 때 “자신보다 앞에 있음을 초래하는, 걱정하고 우려하는 인간의 성향과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잠재적 발생에 대한 이러한 우려는 미래가 현재에 존재하도록 허락한다. 현재는 경험이 되는데 이는 수량적인 대신 질적인 것이다. 그는 이것이 시간과의 직선적인 관계 또는 일시적인 존재가 단절되거나 초월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순차적인 시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하거나 미래를 계획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일시적 존속이라는 우리의 표상에 일종의 임의적 접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두 명제에 몰두했는데 그는 우선 존재와 존재자를 구분하고, 서양의 형이상학은 존재가 아닌 존재자에 대해 묻고 존재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기에 근본적으로 허무주의적 특징을 갖는다고 하였다.
존재에 대한 이해는 인간 존재방식의 본질이며 그는 이를 실존이라 하고 인간의 본질을 현존재(거기 있음)라고 하였다. 현존재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상(三相)의 통일인 시간성으로 제시되며 인간이 시간적, 역사적 존재라고 한다.
현존재는 자기의 존재를 이해하고 다른 것과 관계 있는 ‘관심’으로서의 존재이며 이 관심이 자기가 죽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에 직면하여 유한적인 시간성 속에 있다는 것이 명확히 되어 본래의 자기를 깨닫는 것이다.
이같이 실존인 인간존재는 무로 돌아가는 존재이며 그 존재방식은 불안이라는 것이다. 이 불안에 의해 존재하는 것은 일상성으로부터 탈각한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간의 존재방식이 그가 말하는 ‘세계 안의 존재’이며 인간 존재의 근본적 성격을 이룬다. 현존재란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이다. 죽음 앞에 섰을 때, 현존재는 결국 자신이 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날마다 시시각각 그에게 다가오는 죽음은 인간이 결국 한 순간을 살다가는 존재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 죽음은 외부에서 다가오기 보다는 처음부터 그에게 붙어 있었다고 봐야 한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반드시 죽게 되는데 인간 역시 이 세상에 살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미 죽음을 자신 가운데 잉태했다고 봐야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화되는 상태에서 불안을 느낀다. 그러나 절대적 한계점을 가지고 죽음을 바로 본다는 것은 현존재만이 갖는 의미심장하고 긴박한 문제이기도 하다.
만일 우리가 수명을 무한하게 늘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긴박하거나 중요한 것으로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시간이라는 지평선 안에서 살다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을 살도록 깨닫게 한다.
인간은 언젠가 그에게 다가올 죽음을 ‘앞서 취함’으로써 자기의 본래적이고 고유한 삶을 자유롭고도 책임감 있게 이끌어갈 수 있다. 죽음은 거부하고 부정해야 할 저주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존재의 삶을 유일하고도 가치 있는 것으로 깨닫게 해주는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죽음을 애써 외면하는 사람은 비본래적이고 무의미한 세상에 몰두함으로써 일상적인 현존재, 이른바 일상인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일상인은 그저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영혼 없는 동물처럼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에게 내일이란 없다. 오직 죽음을 선취한 현존재만이 이러한 일상적인 비본래성에서 자신의 본래성을 회복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죽음에 대한 ’선구적 결의‘를 통해 현존재로 바뀔 수 있으며 이 현존재만이 타락한 일상인에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는 또 언어란 단순한 의사소통이나 교제수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몸담고 있는 ’존재의 집‘으로 보았다.
존재가 바탕이 되어 인간의 사유가 생겨나고 이 사유를 통해 언어가 흘러나온다면 언어에는 반드시 존재가 들어있기 마련이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자와 시인은 가장 멀리 있으면서도 가장 가깝게 서로를 느낀다. 이러한 철학적 견해들은 시간에 대한 우리의 지평을 넓히는데 도움이 되지만 엄청난 통찰력이나 예지를 주는 것 같지는 않다.
나의 짧고 무지한 생각으로는 좋은 머리를 가진 이들이 평생을 바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니 존중되어야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느끼고 깨닫고 행동하는 것을 이론적 논리적으로 정리한 것에 다름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1922년 파리에서 있었던 프랑스 철학회에서 아인슈타인의 강의에 청중으로 참가한 베르그송은 상대성 이론에서 시간의 개념에 대하여 질문하면서 그와 논쟁하였는데 아인슈타인은 “과학자의 시간과 철학자의 시간은 서로 다른 모양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는 시간과 공간을 합친 시공간이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주요한 틀을 제공하였다. 이에 의하면 우주에서는 빛의 속도보다 빠른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블랙홀 인근에서는 빛도 흡수되어 사라지고 시간도 중력에 의해 왜곡될 수 있다고 한다. 블랙홀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한 스티븐 호킹 (1942-2018 영국 과학자)도 우주의 생성과 소멸을 연구한 저서 “Brief History of Time” 에서 우주의 역사를 138억년 전 발생한 폭발사건 ‘빅 뱅’ 에서 시작된 시간의 역사로 보았다. 그 이후 현재까지 138억년이 지났고 우주의 팽창속도는 가속되고 있다고 하니 속도는 시간의 요소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