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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간의 속도
그럼 시간과 속도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의 시간은 어떤 속도로 흘러가는가? 우리가 만들어낸 시간의 개념 속에서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km(진공상태) 라는데 태양에서 더 멀리 떨어진 행성이나 다른 태양을 모시고 있는 태양계 밖의 행성들에서도 우리와 같은 시간개념을 사용하고 있을까? 우리들의 1초의 속도는 거기에서도 같이 30만km일까? 그들과 우리의 시간 기본단위가 다르다면 서로 소통하는 것이 가능할까? 시간은 우주 어디에서나 같은 차원에서 존재하는 것일까? 시간의 개념이 다르다면 차원도 다른 것인가? 차원이 다르면 서로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소통할 수도 없는 것일까? 점.선.면으로 이루어진 우리가 인식하며 살고 있는 이 3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은 어디에 위치하는 것인가? 어떤 이론은 시간을 더하여 우리가 사는 세상을 4차원이라고도 한다. 우주의 티끌보다 못한 이 지구에서 살며 이러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가소롭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조그만 지구가 사실상 가능한 세계의 전부이니 주어진 존재 내에서 시간을 생각해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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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며 시간이 빨리 간다고들 말한다. 사실 같다. 이는 마치 같은 시간 내에 연주되는 음악이라도 빠른 음표들로 가득 찬 곡은 빨리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닐까 한다. 결국 시간의 속도는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심리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심리적인 것이 꼭 물리적인 것보다 하위에 있다고 할 수는 없고 그 반대가 실체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의 길이라는 물리적 법칙은 이미 주어져 익숙한 상수이고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심리적인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 주어진 물리적 시간의 길이가 같더라도 그 시간 속에 음표를 얼마나 많이 또 얼마나 빠른 속도로 채웠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여러 다른 종류의 삶=시간을 살다가 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온음표로 가득 채워진 느리고 여유 있는 삶과 빠른 음표로 꽉 채워져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삶이 있을 것이고 그 중간에 여러 템포와 강약으로 진행되는 삶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 어떤 삶이 더 좋은 것인가는 주관의 영역일 것 같다. 어떤 삶이든 그 지향점은 죽음으로 같은 것이고 인간 개개인이나 인류라는 종으로서 수 십만년이 된 삶의 길이도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점만도 못한 것이니 자기 리듬에 맞는 삶을 살다가 갈 뿐이다.
구약성경의 Job이 그 엄청난 고난 끝에 깨달은 것처럼, 우리가 창조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시간을 공짜로 쓰면서 창조자를 향해 무슨 불평이나 불만을 가질 수 있을 것인가? 하이데거가 깨달은 것처럼 ‘우리가 시간’ 이니 시간은 생명 그 자체이다. 또 현대인들에게 시간은 돈이고 다른 모든 것이기도 하다. 시간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분야가 음악이다. 블로흐(1885-1977 독일 철학자) 에 의하면 예술은 비동시성 이라는 독특한 시간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예술은 세계의 실제적 과정과 평행적으로 전개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음악적 대작들(바하, 베토벤, 바그너의 작품들) 이 왜 각각의 시대상황을 초월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던가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예술은 시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전의 독일 철학자 셸링은 “예술은 유한자 속에서 무한자의, 특수자 속에서 보편자의, 현상 속에서의 절대자의 표현이다” 라고 하면서 유한자인 우리는 “예술을 통해 무한자-보편자-절대자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또 음악은 시간예술, 회화와 조각은 공간예술로서 시간은 무한자가 유한자로 들어와 형성되기 위한 보편적 형식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음악의 3대 구성 요소인 리듬(강약과 템포), 화성, 선율 중 시간 요소인 리듬의 움직임은 우주의 움직임으로서 이는 행성의 질서를 지배하는 것으로 음악은 가시적인 우주 자체의 리듬과 화성 이외의 다름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는 화성과 선율에 집중했던 18세가 음악으로부터 리듬에 주목하는 철학적 파라다임 전환을 이루었다. 그는 “리듬은 자기 자신 속에 시간을 갖고 있다”고 하였다.
음악이 시간 속에서 진행되는가 아니면 그 자체로 시간 형태인가라는 질문은 위와 같은 리듬 정의로 대답될 수 있다. 리듬은 분화되지 않은, 항상 흐르는 운동(시간)에 질서를 도입한다. 리듬에 집중함으로써 그는 음악을 예지적인 예술형식으로 간주한다. 이로써 그는 이전의 음악미학으로부터 칸트에 이르기까지 음악의 본질적인 요소였던 감각을 단순히 주관적인 기준으로 간주하며 이로부터 거리를 둔다. 그에 의하면 음악은 바로 리듬을 통해서 시간에 대한 지배자가 된다. 베토벤도 절대자의 계시의 형식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셸링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또 유한자와의 화해를 추구하는 무한자에 대한 영원한 메시지로서 막을 내리는 음악의 의사소통적 기능에 대한 확신을 그와 공유하였다고 한다.
이에 의거하여, 후에 하이데거는 본질 구성적인 들음과 인지하는 들음 사이의 구별(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을 베토벤을 예로써 설명하기에 이른다. 그는 “귀가 아니라 우리가 듣는다, 귀를 통해 듣기는 하지만 귀와 함께 듣지는 않는다. 따라서 귀가 멀어도 베토벤 처럼 여전히 들을 수 있거나 이전보다 더 많이 더 위대한 것을 들을 수도 있다”고 한다. 청각장애가 되었다는 사실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더 이상 음악에 장애가 되지 않게 된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