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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생각한다(5)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칼럼
쇼펜하우어(1788-1860, 독일 철학자)야 말로 예술을 통한 인간 정신의 구원을 주창한 선구자이지만 그는 그 구원은 지속적이 아니라 단지 짧은 시간 동안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데아들에 대한 관조를 통하여 인식 주체는 의지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며 인식의 순수한 무의지적 주체로 기능한다. 관조를 통하여 의지가 초래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으로, 예술작품의 생산과 수용을 통해 이데아들에 대한 미적 관조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을 이데아들의 현시로 파악한다.

예술작품들을 받아 들이는 사람들은 자신속에 침전되어 있는 이데아 인식, 그리고 이와 결부된 것으로서 작품에 대한 황홀경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예술작품들은 비범한 인식형식들을 받아 들일 수 있는 수용자의 능력을 전제하고 있다고 한다.

니체(1844-1900, 독일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의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는 염세주의를 옹호한다.

그는 플라톤의 저서 ‘Phaidon’의 끝 부분에 기술된, 소크라테스가 죽기 직전에 자신이 죽은 후에 아스클레피오스(그리스 신화에서 치유와 의술의 신)에게 닭을 바치라고 크리톤에게 부탁하는, 구절이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 구절을 소크라테스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죽음을 통해 치유되는 질병으로 간주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신이므로 인간들은 병이 나은 후에 그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세상의 삶을 질병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세상에서 좋은 삶에 도달하기를 기대할 수 없었다.

그는 이 세상으로부터 분리된 다른 세상을 믿었던 것이니 삶에 연연하지 않았던 것이다. 니체가 소크라테스 이래 그리스철학은 기독교를 위한 준비에 불과했다고 믿었던 이유이다.

니체가 소크라테스를 거부한 것은 그가 초월적 세계에서의 삶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니체에게는 오직 하나의 세상, 그 속에서 모든 것이 생성되고 사멸해야만 하는 하나의 세계만이 존재한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삶 그 자체를 살아감으로써 인간의 삶을 정당화한다. 니체는 현존재를 계속적인 삶으로 유혹하는 것을 예술의 기능으로 보았다.

쇼펜하우어의 개인적 의지의 부정은 삶을 부정하는 염세주의를 말하지만 니체의 개인적 의지의 긍정은 삶을 긍정하는 염세적 낙관주의 철학이라고 할 것이다. 둘 다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로 인식하지만 이를 견뎌가는 방식은 다른 것이다.

가다머(1900-2002 독일 철학자)에게는 존재자에 대한 인정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어떤 한계에 대한 통찰을 뜻한다. 끝없이 앞으로 나가는 시간 속에서 불연속의 순간들, 정지의 순간들이 존재한다.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날 때 불연속의 순간이 존재한다. 지인의 죽음을 경험하면 그 사람의 존재 방식에 대한 우리의 의식이 갑자기 변해 버려서 그에 대한 우리의 모든 지식이 정지해 버리게 된다. 음악은 연주되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음악은 근본적 의미에서 시간적이다. 음악에서는 ‘정지해 있는 지금’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얼마 동안 머무르는 것이다. 무엇엔가 몰두하는 사람은 시간을 잊는 법이며 음악의 본질은 ‘실행되는 가운데 멈춰섬’이라고 한다.

독일 현상철학의 창시자 후설(1859-1938)은 인간은 자신의 경험들의 선후의 지평을 통해서만 시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음악은 시간을 인식하게 해주는 기능을 갖는다고 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시간체험은 시간 속에서의 삶과 삶 속에서의 시간 사이의 변증법적 긴장관계 안에 있다.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 불명확하게 한정된 시간(수명)을 대하며 어떻게 그것을 의미있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인간의 시간성을 무엇보다도 윤리적 상황으로 파악해야 함을 암시해 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인간은 시간을 도덕적으로 사용하도록 스스로 결단할 자유를 지니고 있다.

엔데 (1929-1995, 독일 판타지 문학가)의 동화적 소설 ‘Momo’의 주제(사람들에게 시간을 절약하여 ‘시간저축은행’에 예금하면 이자를 붙여 늘어난 시간을 되돌려 준다고 유혹하여 예금된 시간들을 자신들의 목적에 이용하는 기생충 같은 비정상인들과 도둑 맞은 시간을 사람들에게 찾아 주는 한 여자 아이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는 시간의 현시성과 윤리성을 흥미있게 부각시켜 준다.

아도로노(1903-1969, 독일 철학자)는 음악은 사회의 흔적들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고 한다. 작곡가는 그때 그때 소재의 ‘실제상태’ 에 맞게 자율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다. 이를 통해 사화와의 대결이 예술 생산 속에 개입된다. 작곡가의 현실적 시대정신의 체험을 통해 음악작품이 창조된다는 것이다. 음악 작품 속에 시대정신이 들어감으로써 시간을 불멸하게 붙잡아 둘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은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듯 어디서 왔는지 모르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그 시간 내에 자신만의 삶을 창조해 나가는 것이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던지 간에 시간=삶 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만을 가지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그런다고 시간이 멈춰주는 것도 아니고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지나가는 것이니 그저 시간을 나름대로 유용하고 사용하고 남의 시간을 도둑질하거나 타인의 시간에 해를 끼치지 않는 윤리적 시간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할 듯 하다. 우리가 100년을 산다고 해도 1,200 달에 불과한 시간이니 하루라도 허비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것이 시간이 아닌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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