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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관 기자가 쓴 ‘노무현 트라우마’라는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1부 〈‘지·못·미’ 노무현〉과 2부 〈문재인의 운명과 윤석렬〉로 구성되어 있다. 기자 본연의 냉철한 관찰자적 시점에서 진영의 논리에 빠지지 않은 채 매우 담백하게 시대적 과제들을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1부 〈‘지·못·미’ 노무현〉에서는 퇴임 후 이명박 정부의 출범과 함께 검찰의 모욕주기 수사로 비롯된 그의 죽음과 그로 인한 노무현 트라우마의 형성과정을 서술하였다. 비록 노무현은 갔지만, 우리에게 남겨진 노무현 시대의 끝나지 않은 과제들을 되짚었다.
노무현은 ‘정치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된 우리 헌정사에 없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세종’이 되고 싶었지만, 구시대의 막내 노릇을 할 수밖에 없는 ‘태종’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낙담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군사정권이 종식되고 87년 직선제 개헌을 통한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래 군부의 통제를 받던 국정원과 기무사의 권력이 점차 약화 되는 것과는 달리 정권의 견제를 받지 않던 검찰은 상대적으로 가장 강력한 권력기관이 되었다.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을 7번이나 바꾸는 동안 검찰은 정파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적 사정과 수사로 자신의 존재감을 키워왔다.
이에 최초로 검찰을 개혁하려다 좌초된 노무현 정부의 검찰개혁에 대한 구조적 한계와 시대의 열망에 부응하지 못했던 진보 진영의 분열과 모순이 정치사적 사건마다 생생히 표출되었다. 검찰을 개혁하려다 검찰의 칼에 희생된 ‘순교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한 상흔과 노무현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지지자들의 죄책감으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촉발된 대중 의식의 새로운 변화와 함께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을 작가는 밀도 있게 분석하였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 하나는 검찰이 권양숙 여사에게 재소환 조사에 응해 달라고 요구한 날짜가 노 전 대통령이 죽음을 택한 ‘5월 23일’이었다는 것이다. 끝내 노 전 대통령은 부인이 검찰에 다시 불려가기로 한 날 죽음을 택한 것이었다.
2부 〈문재인의 운명과 윤석열〉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좌초된 검찰개혁의 유훈을 이어받은 문재인표 검찰개혁이 실패하게 된 과정을 기술하였다. 이 과정에서 빚어진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대결 구도로 탄생한 ‘윤석렬 드라마’를 상세히 묘사하였다.
박근혜 정부가 탄핵을 당하여 불명예 하차하게 되자 진보 진영은 노무현의 후계자로 문재인을 선택했다. 그리고 노무현을 죽인 검찰과 정치 세력을 심판해야 한다는 집단 심리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과 검찰개혁을 추진하는원동력으로 작용하였으며, 정치적 위기 때마다 그를 떠받치는 구심점이 되었다.
정조이래 개혁을 주창하는 진보 세력에게는 유사 이래 단 한 번도 없었던 권력이 문재인에게 집중되었다. 압도적 지방의회 권력과 여당 의원 180석이라는 전무후무한 가공할 힘이 그에게 주어졌다. 역대에 누구에게도 주어지지 않았던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그는 허망하게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는 인사에 있어 치명적 결함과 무능을 드러내었다. 오직 절차적 정당성만을 강조하다 개혁의 대의를 망각하고 만 것이다.
책을 통해 알게 된 불편한 진실은 ‘윤석열의 영입’이 보좌진의 추천에 의한 것이 아니고, 대통령이 직접 윤석열을 사저로 불러서 식사하면서 검찰총장을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해서 맡게 된 것이란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또한 자신의 사임이 용퇴가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의 경질이었다는 것이다. 문재인은 자신이 정치인이 된 것은 노 대통령 때문이라고 누차 말하였다.
그렇다면 노무현이 이루지 못한 검찰개혁을 임기 초에 과감하게 단행했어야만 했다. 김영삼이 하나회 척결하듯이 검찰개혁을 했어야만 했다. 애초에 조국을 민정수석으로 임명할 것이 아니라, 정권 초부터 법무부 장관에 임명하였더라면 윤석열이라는 괴물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아니하였더라도 윤석열을 검찰총장에서 조기에 물러나게만 했다면 그는 검증의 과정에서 후보가 되지도 못하였을 것이고 보수 진영은 인물난으로 헤매었을 것이다.
검찰개혁을 최우선 과제로 밀어붙였던 문재인 정부가 자신이 임명한 검찰총장에게 도리어 권력을 내주고 말았으니 이런 비극적인 아이러니가 없다.
책을 읽고서 깨달은 것은 노무현 정부가 ‘검찰 내 우군’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 검찰개혁의 실패 요인이었다면, 문재인 정부의 검찰개혁 실패는 전적으로 문재인 자신의 ‘전략적 대응 미숙’과 ‘인사의 오판’에 있었다는 생각이다.
황석영이 쓴 소설 『장길산』에 이런 말이 있다. “세상에는 무서운 것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에 가면 범이 무섭고, 둘째는 무식한 놈 돈 많은 것이 무섭고, 셋째는 미친놈 칼자루 잡은 것이 무섭다”
그러나 오늘날엔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해야 한다. 그 넷째는 권력을 쥔 자가 들이대는 ‘법대로’ 타령의 무서움이다. 권력을 쥔 자가 입만 열면 ‘법과 원칙’을 강조하며 온갖 명분을 다 갖다 붙여 권력을 빼앗긴 자에게 ‘법대로’의 보복을 자행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노무현 트라우마’는 후계자 문재인을 통하여 해소된 것이 아니라 ‘검찰 트라우마’라는 새로운 역병을 창조해 냈다. 그 고통의 대가는 오로지 국민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