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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룡지기 - 屠龍之技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주평만(朱泙漫)은 용 잡는 법을 지리익(支離益)에게 배웠다. 천금이나 되는 가산을 써가며 삼 년 만에야 그 재주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써먹을 곳이 없었다”
朱泙漫學屠龍於支離益, 單千金之家, 三年技成而無所用其巧.
『장자-莊子』 「열어구-列禦寇」

‘도룡지기’란 용을 잡는 기술을 말한다. 대단한 기술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쓸모가 없는 기술을 비유하는 말이다.

천하에 남이 알지 못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다 한들 세상에 용이 없다면 한갓 쓸데없는 재주가 되고 마는 법이다.

세상에는 ‘신학(神學)’에 정통한 목사들이 매우 많다. 그중에는 자신만이 신의 뜻을 안다고 자처하는 ‘직통 신자’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비록 그들이 날마다 신과 접신하여 ‘직통 계시’를 받았다 할지라도 ‘인간학(人間學)’에 무지하여, 인간의 본성에 대한 철학적 고뇌가 없다면 그것은 한낱 ‘도룡지기’에 불과하다.

천하가 알지 못하는 특출난 능력, 이른바 ‘신의 음성을 분별할 줄 아는 특별한 지혜’를 자신만이 홀로 가졌다 할지라도 ‘필드에 대한 존경심’ 즉 삶의 현장에서 체험으로 얻어지는 실천적 사랑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조롱에 갇힌 앵무새의 방언과 같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할 뿐이다.

바울의 교리를 주문처럼 외우면서도 불교의 ‘금강경’이나 ‘화엄경’ 한 줄 읽어본 경험이 없거나 유가의 ‘논어’나 ‘주역’ 한 줄 읽어본 경험이 없다면, 그는 어떤 종교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율법에 관통하면서 ‘조선’과 ‘이 땅의 역사’에 무지하다면, 그 사람이 만난 예수는 박제된 이스라엘의 예수일 뿐이다. 죽은 예수를 만나기 위해 이천 년 전의 이스라엘로 돌아갈 것이 아니라, 오늘 이 땅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하시는 살아있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말하기를 “누구도 자신의 인격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신을 찾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한국의 기복주의적 기독교인들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다.

예수가 원하는 제자는 ‘살아서 복 받고 죽어서 천국 가는’ 그런 주술적이고 의존적인 신자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을 위한 세속적 ‘복’을 구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고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가 되기를 주문하였다.

그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자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지 않았던가?

신앙은 신을 경외하는 외적 표현이나 경건으로 무장된 외식행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신(神)’과 화평하고 ‘인간(人間)’과의 소통이 온전히 회복 되어질 때, 그때만이 비로소 신앙생활의 참된 의미가 있다.

‘경천(敬天)’은 하되 ‘애인(愛人)’의 증거가 없다면 신(神)은 반드시 이런 사람을 부인하고 말 것이며, ‘애인(愛人)’을 하였으되 ‘경천(敬天)’에 소홀하였다 하여, 신(神)이 반드시 그를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란 ‘만사형통’의 주술적이고 이기적인 욕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창기와 세리의 친구였던 ‘가난한 예수’의 이타적 삶을 닮고자 하는 데 있는 것이다.

공자께서도 말씀하였다.

“만약 주공과 같은 훌륭한 재주를 가졌다 하더라도 가령 교만하고 인색하다면 그 나머지는 볼 것이 없다.”
子曰: 如有周公之才之美, 使驕且吝, 其餘不足觀也已.

인본주의를 배제한 신본주의는 언제나 실천이 없는 관념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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