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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그림... 나의 파스티쉐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칼럼
근년에 가끔씩 꿈속에 나타나 나를 애태우는(haunt) 여정이 있었다. 처음에는 너무나 아름답고 리얼하고 황홀한 그 여정이 실제로 내가 가고자 했던 길이었다고 비몽사몽간에 받아들였었다. 에베레스트 산에 가는 길인데 출발점은 따뜻하고 아름다운 호수길이었다. 그곳은 분명 네팔은 아니고 내가 어딘가에서 살 때 익숙했던 장소로 뉴질랜드나 노르웨이의 만년설 아래로 느껴졌다. 그 호수를 지나서 노르웨이에서 본 것으로 보이는 크고 넓은 눈 산길을 넘어가니 히말라야 산맥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눈길을 몇 시간 걸어서 몇 개의 봉우리를 넘고 좌측으로 돌아서니 멀리 에베레스트가 그 위용을 나타냈다. 

그러나 혼자 오르는 엄청나게 큰 눈 덮인 산길인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해지기 전에 도저히 되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 다음날을 기약하고 내려왔다. 도중에는 오래된 한국의 절이 있어 화려한 단청도 둘러본 기억이 생생하였다. 그리고 내려오다 그만 꿈이 깨서 너무나 아쉬었다. 곧 다시 누우며 그 장면은 분명 어디선가 보았던 현실이라고 믿으며 꿈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다행이 꿈은 계속 이어졌으나 역시 호수를 지나 우측으로 눈 덮인 산길을 걸어 절을 지나 이제 좌측으로 굽어지는 길에 이르기도 전에 그치고 말았다. 너무나 아름답고 익숙한 그 절경들은 한동안 분명 현실 속의 어디라고 느껴졌다. 그 후 20여년 전 잠시 들렀던 대서양 카나리 제도로 보이는 수 많은 섬 사이를 헤매는 등 조금씩 가감이 있으나 호수가와 눈 산길을 올라 아름다운 단청이 있는 절을 지나 눈 덮인 같은 길을 가는 그 장면을 1년여에 걸쳐 몇 번 꿈속에서 다시 보았으나 끝내 에베레스트를 다시 보지는 못하였다. 작년부터는 아쉽게도 아예 그 꿈을 다시 꿀 수도 없게 되었다.

꿈 속에서 빠짐없이 등장한 그 아름다운 호수에는 수영하는 이들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뉴질랜드의 어느 풍경인 것 같으나 아직도 특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호수를 지나 눈 덮인 산길을 오르는 곳은 분명 십수년 전 여름 휴가때 하루 동안 둘러보며 그 아름다움과 위용에 감탄하였던 2,000m급 산이 있는 노르웨이 중서부 지방의 Reinheimen 국립공원이라고 믿고 있다. 여름이라 아래는 눈이 녹아 야생화가 만발하였으나 산 위에는 만년설이 덮여 무섭게도 느껴졌던 곳으로 노르웨이를 다시 여유롭게 여행한다면 꼭 다시 보고 싶은 곳이다. 

내 생각에는 이 지구에서 가장 조용하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그래서 슬프기도 한 비장미를 갖춘 곳이 아닐까 한다. 그 꿈 속의 풍경들은 과거의 기억에서 파생된 일종의 파스티셰(pastiche 그림 등이 여러 스타일을 혼합한 작품)일 것이다. 그것은 캘리포니아 중부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2,700m급 Half Dome에 오르고자 산 아래에서 일박하고 아침에 출발하였으나 일행중 한 명이 무릎이 아파 시간이 지체되면서 3/4지점에서 화강암만 만져보고 부득이 철수해야 했던 십수년 전의 아쉬움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젊었던 시절, 히말라야 줄기 아래 살면서 1월 1일 아침 에베레스트 정상 위로 떠오르는 해를 보기 위해 카투만두 시내 외곽의 나가르코트라는 2천미터 가까운 봉우리에 차를 몰고 갔었다. 240km 거리의 8,848m 에베레스트는 맨 눈으로도 눈산들의 파노라마 뒤로 멀리 그 모습을 볼 수 있었고 그 보다 가까운 안나푸르나봉 등은 더 크고 눈부시게 하얀 자태를 보여 주었다. 

한번은 카투만두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인 포카라 Fewa호수 중간의 조그만 섬을 독차지한 안나푸르나 롯지에서 하루 자고 photogenic으로 유명한 7천m급 마차푸차레 봉을 빨갛게 물들이는 아침 햇빛과 호수에 비친 그 환상적인 모습을 본 다음에 이번에 한국인들이 눈사태에 휘말린 안나푸르나 트래킹 길을 하루 걸으며 히말라야의 여러 봉우리들을 가까이서 볼 수도 있었다. 이제 40년이 지난 일이나 엊그제 일처럼 마음속에 남아있다. 지금도 안나푸르나 일주일 트래킹을 꿈꾸고 있으나 무릎이 버텨줄지 아직 확신이 안 선다. 30년도 안 지난 뉴질랜드의 풍경은 과거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며 제법 이곳 저곳 구경 다니고 스키도 여러 곳에서 타서 미련은 없는데 아름다운 퀸스타운 지역의 호수들이 마음에 많이 남아 추억 속에 파스티셰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모양이다. 내 나이 서른이었으니….

이 아름다우나 안타까운 꿈은 과거로의 추억여행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꿈은 이미 이루어진 것과 아직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의 혼합이라, 다르게 생각해보면 과거로의 여행 back to the past가 아니고 미래로의 추억여행 back to the future가 아닌가 한다. 수태 후 한 점보다 작은 존재에서 시작해서 미래로의 여행을 떠나온 우리는 지나온 시간과 공간을 100년 내외의 어느 시점에서 모두 모아 매듭을 짓고 그 여정을 마무리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수시로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고 거기에 새로운 시공간을 더하여 간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지난 세월 속에서 보고 느꼈던 최고의 추억과 더불어 못다한 아쉬움을 마지막 한장의 그림으로 모은 파스티셰를 만들어 가지고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닐까. 꿈속에서 애타게 그려봤던 나의 파스티쉐는 완결되지 못했으니 최종판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해가 지기 전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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