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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차인 1월5일, 목요일에는 고대하던 청명한 날씨가 찾아왔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셔틀버스로 시가고겐 야마노에키로 30분을 간 후, 다시 요코테야마행 셔틀로 갈아타고 20여분 후 구마노유에 내렸다.
종점 두 정거장 전이나 전에는 요코테야마 정상에서 내려와 온센만 하고 스키는 안타봤던 지역이라 몇 개의 게렌데를 점검하였다. 중간 길이의 게렌데들이나 정설이 안된 슬로프들이 많아 힘이 들었다. 11시에 구마노유 정상에 모두 모여서 눈 앞에 펼쳐진 광활한 눈 덮인 큰 산들을 조망한 다음, 왼쪽으로 난 편안한 Green길을 따라 대망의 요코테야마 스키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요코테야마 베이스에서 정상까지는 세번의 리프트를 타야 하나 우리는 이미 두번째 리프트에 도달해 있었다.
리프트 양쪽으로는 예전만은 못하나 2미터 정도의 적설이 있어 아름다운 수빙을 볼 수 있었다. 마지막 리프트로 2,300m 정상에 오르니 요코테야마였다. 11:30도 안되었으나 일본 최고도에서 만든다는 빵 맛을 보고자 모두 그 유명한 빵야로 향하였다. 러시아·폴란드식 보르시치 숩과 빵을 먹기 위해서였다.
붐비는 와중에 겨우 자리를 잡고 주문 후 20여분을 기다려 숩과 빵을 먹으니 일단 큰 일을 해낸 듯 모두 안도하였다. 식후에는 정상 건너편의 시부토게 지역으로 넘어갔다. 시가고겐에서 수빙이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넓고 편안한 게렌데에서 마음 놓고 기술을 연마하였다.
5월 말까지도 활주가 가능하다는 슬로프를 내려가니 군마현과 나가노현의 경계였다. 남동향으로 200km는 떨어져 있을 후지산 쪽으로는 약간의 구름이 있어서 산을 볼 수는 없었다.
시부토게 게렌데를 두어번 오르내린 후, 정상 리프트 하우스 2층의 유명한 크럼펫 카페에 들려 베란다에서 2,307m 인증샷도 찍고 카페도 둘러보았다.
일행은 서둘러 내려가고 나 혼자 카페에서 크럼펫과 커피를 즐긴 후, 2,307m에서 볶은 원두도 두 봉지 사서 배낭에 넣었다. 예전에 노르웨이 스키협회 부회장이 시가고겐은 ‘동양의 생 모리츠’라고 평했던 것을 기념하여 벽에 붙여두었다던 노르웨이 국기가 이제 사라져 벽이 좀 허전하였으나 카페 분위기는 여전히 따뜻하였다.
요코테야마 베이스에서 3:30에 떠나는 셔틀로 야마노에키로 가서 다시 오쿠시가 행 셔틀을 갈아타고 호텔에 오니 5시가 다 되었다. 프린스 호텔 서관 욕탕은 주말에는 서관 투숙객들만 이용할 수 있다기에 오늘도 만족할 만한 하루였다고 생각하며 호텔 방 욕탕에 몸을 담갔다.
4일차인 1월6일, 금요일에도 날씨가 청명하였다. 일부는 다시 호텔앞 야케비타이야마와 오쿠시가 지역을 섭렵한 후, 이치노세와 다카마가하라, 히가시다테야마와 호뽀부나다라-자이안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정을 택하였다. 그러나 그제 목동을 따라 나섰다가 길을 잃고 기진맥진했던 기억도 잃어버린 듯 네명의 어린 양들은 다시금 확신에 찬 J대사를 따라 푸른 초원 대신 하얀 수빙을 그리며 요코테야마로 향하였다.
날씨가 좋으니 오늘은 후지산을 볼 것이라는 희망도 가득하였다. 이번에는 마음이 급하여 요코테야마 베이스인 종점까지 셔틀로 가서 바로 정상으로 향했다. 그러나 아뿔사, 그제의 실수를 만회코자 오늘 다시 리더가 된 J대사의 헬멧에 달려 있어야 할 고글이 보이지 않지 않은가? 셔틀버스를 타고 내릴 때까지 본인은 물론 아무도 그의 고글의 부재를 몰랐던 것이다.
급히 베이스의 숖에 가서 이런저런 고글을 살펴봤으나 안경 위에 쓸 수 있는 큰 사이즈가 없었다. 이렇게 맑은 날 고글없이 눈 밭을 헤매다가는 설맹이 될 수도 있는지라 J대사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셔틀로 한시간 거리의 호텔로 돌아가서 고글을 찾던지 새로 사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졸지에 장수 잃은 병졸이 되었고 J대사의 리더쉽 만회는 다시 다음 기회로 미뤄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나도 이미 이 산이 세번째이고 다들 두번째이니 오합지졸은 아닌지라 망설임 없이 정상으로 행했다.
우리는 10시 조금 넘은 이른 시각에 정상에 도착하여 여유있게 수빙을 즐기며 시부토게 쪽으로 넘어갔다. 짙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각자 자세를 점검하고자 동영상과 정지 영상도 찍고 200km도 넘을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는 후지산으로 짐작되는 것도 보았다. 이를 후지산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였기에 그렇다고 단정하기로 하였다.
세익스피어는 “연인과 광인과 시인은 머리가 상상력으로 가득 차서 냉정한 이성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파악한다”고 조롱했는데 우리도 그 순간에는 그 중 하나가 되어 있었던 것일가. 아니면 그 셋 모두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2,300m 고산지대 아래 광활한 시부토게에서는 멀리 눈 덮인 많은 고산들의 파노라마가 보일 뿐더러 투명한 코발트색 하늘 아래 Snow Monster라고 불리는 여러 형태의 수빙들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으니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 미치고 그들을 시로 찬양했다고 해도 ‘한 겨울 대낮의 꿈’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었으리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