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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에 스키를 탈 수 있다는 것은 은퇴가 가져다 준 가장 큰 선물임을 새삼 감사하며 새벽 6시 용평행 셔틀버스에 올랐다. 원래는 예년처럼 3월 말에 시즌을 마감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몸 상태가 예전같지 않고 다른 일정 때문에 이번 주쯤 스키를 접을 생각이다.
입춘도 지났고 일기예보도 앞으도 큰 추위는 별로 없을 것이라는 말에 용평 스키장 시즌로커에 보관해 둔 장비도 찾아온다는 구실로 길을 나선 것이다. 새벽 어둠 속 버스에서 잠도 자고 군고구마도 먹으며 두시간 반을 달렸다. 오랫동안 일백번도 더 다녀 이제 지루해진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언제 보아도 마음을 설레게 하는 설국이었다. 주차장에서 버스가 멎었다. 아침 햇볕이 슬로프의 흰 눈에 부딪쳐 유리처럼 빛났다. 청명한 날씨, 08:50, 슬로프 베이스의 온도계 탑은 영하 4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요즘 평균 날씨이나 낮에는 기온이 영상 8도까지 오르니 스키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작년 11월 말 시즌 오픈하여 올 3월 29일 오프하는 이번 시즌에는 이런 저런 사유로 지난 시즌에 비해 절반 정도밖에 오지 못했다. ‘시즌 버스권’을 ‘시즌 리프트권’에 추가하지 않은 것도 몇 년이래 처음이지만 여덟번은 왕복 이용해야 ‘시즌 버스권’ 값을 하는데 다른 교통편으로 몇 번 가기도 한 탓에 셔틀버스 이용은 그에 좀 미쳤으니 오랜만에 현명한 경제적 선택을 한 셈이다.
곤돌라를 타고 1,450미터 발왕산 정상에 오르니 영하 6도. 바람은 없고 상쾌한 공기가 몰려왔다. 금년 겨울은 몇 년 만의 최악의 눈 기근이라 용평에서도 자연설은 거의 구경을 못했다. 같이 곤돌라를 타고 오른 호주인들은 이렇게 좋은 인공 눈은 처음이라고 좋아하였다. 잘 다진 인공 눈이 더 잘 미끄러진다고 스키어들이 선호하기도 하나 나는 좀 팍팍하더라도 자연설의 부드러움을 좋아하는 편이다. 한국에서 제일 긴 5키로가 넘는 ‘Rainbow Paradise’ 슬로프를 내려오며 이렇게 좋은 눈 상태라면 최상급 ‘Rainbow 1-4’ 와 ‘Silver’ 슬로프에도 도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곤돌라로 다시 오른 발왕산 정상에서 좌측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평창동계올림픽에서 ‘대 회전경기’(Giant Slalom)가 열렸던 ‘Rainbow 1’ 은 너무 가파르고 길어서 나에게는 힘에 부치는 지라 최상의 설질이 아니면 도전하지 않는 곳이다. 그래서 한 시즌에 한 두 번만 거기를 내려오면 스스로 만족하는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 된 것이다.
슬로프는 매우 딱딱했으나 다행이 얼음은 거의 없어 조심조심하며 무사히 한번을 내려왔다. 한번은 아쉬운지라 한번만 더 나의 한계를 테스트 해보고 싶어 잣나무와 주목, 참나무의 아름다운 숲 위로 연결된 ‘Rainbow lift’를 타고 발왕산 정상에 오른 후 다시 조심스레 서서히 내려갔다. 자연설로 부드럽게 다져진 눈이라면 다시 한번 도전했을 수도 있으나 두 번으로 만족하고 나머지 2,3,4번 슬로프를 한번씩만 점검하였다. 그리고는 더 이상의 욕심을 버리고 정상에서 편안하게 베이스까지 길게 내려가는 ‘Rainbow Paradise’ 로 향했다..
방학이 거의 끝나가고 학기도 곧 시작되는 시점의 평일이라 한적해진 긴 슬로프를 온통 전세낸 기분이었다. 멀고 가까운 산 아래 전망을 여유롭게 즐기며 내려가자니 도연명의 시가 연상되었다. 채국동리하 유연견남산(採菊東籬下悠然見南山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꺾어 들고 멀리 남산을 바라본다' 라는 뜻으로, 번잡한 세상사를 피하여 숨어 사는 은자(隱者)의 초연한 심경을 비유하는 말이다. 중국 진(晉)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음주(飮酒)〉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5키로를 거의 다 내려가서 왼쪽의 또 다른 최상급 코스로 가는 ‘Silver lift’ 로 향했다. ‘Silver slope’ 도 정상에 서면 발 아래가 안 보일 정도의 급경사이나 길이가 크게 길지는 않은데다 산 아래로 리조트내 건물들과 인근 알펜시아 스키장의 정상이 내려다 보이는 경치가 좋아 항상 도전감을 자극하는 곳이다. 거기도 얼음이 없고 눈이 뭉친 곳도 없어 슬로프 상태는 최상이었다. 맑은 공기로 심호흡 한 후, 이번 시즌 말 새삼 깨달은 급경사 대응 방식을 실습하였다. 양 다리의 무릎 아래 부분과 스키 날의 안쪽을 산 윗쪽으로 많이 기울이며 힘껏 누르고 몸 상체는 무릎과 반대편으로 산 아래쪽으로 기울이는 angulation 자세를 취하면서 원심력으로 상체의 안정을 유지하며 가능한 서서히 미끄러지는 것이다. 이 코스는 항상 스키어들이 많지 않아 충돌의 위험도 적고 폭도 제법 넓어 나처럼 기술이 좋지 않은 사람도 조심해서 내려오면 보기 보다 안전한 곳이다. 그러나 한번 넘어지면 이백여 미터는 곤두박질 할 수 있는 곳이라 항상 정지할 수 있는 under control 상태를 유지하며 내려온다.
<계속>
/최병효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