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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도 이렇게 가고…(2)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칼럼
무사히 한번 내려오니 다시 도전하고 싶어 또 오르고 또 오르기를 여섯번 정도하니 어느 정도 만족감도 오고 다리 힘도 빠진 듯 해서 더 아래 쪽의 ‘Blue lift’ 를 타고 반대편 산의 ‘Gold slope’ 로 향하였다. 이제 신체의 운동 기능이나 위기시의 반응도 상당히 떨어진 나이이니 가능한 급경사는 피하려고 하지만 눈 상태가 좋은 날에는 그 도전을 회피하기가 매우 어렵게 된다. 아직도 이것 저것 세상사에 쓸데 없는 욕심이 많은 탓일 것이다. 그래도 약간은 무모할 수도 있는 육체적 심리적 도전을 통하여 여분의 libido를 발산하기도 하고 생에 대한 의욕을 계속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합리화 해 본다.

11시가 지나니 기온이 많이 올라서 눈은 밀가루 반죽을 닮아가고 발로 주무르기에 너무 힘이 들게 되었다. 게다가 chair lift를 타고 가다가 그 hand bar에 낀 pole 하나가 부러져 ‘Gold Valley’ 정상에서 2키로 남짓을 상이용사처럼 폴 하나만 쓰며 힘들게 내려왔다. 이제 그만 끝내라는 신호로 보였다. 동물뿐 아니라 무생물도 불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만물이 모두 신의 어떤 의도에 따라 만들어졌다면 진화론에서 주장하는 자연의 변화에 의해서 탄생하거나 변화된 물체는 없을 것이고 우리 눈에 쓸모 없어 보이는 저 모든 것들이 악한 것 까지도, 신의 어떤 창조 의도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신의 그러한 의도를 모두 가늠할 수 없다는 데 있는지 모른다. 원자나 페니실린이나 우리가 그 용도를 알기 전에는 무용지물이었고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으니 아직도 이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수 많은 물질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 쓰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신의 비밀을 하나씩 파헤쳐 나가는 것은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자유의지에 의해서 가능하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인가, 아니면 때가 되면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신에 의해 프로그람 되어 있는 것인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도 무한계는 아닐 것이다. 우리가 그 한계와 범위를 어떻게 깨닫고 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음으로써 그의 노여움과 대재앙을 피할 수 있을까? 창조주의 뜻을 헤아려 현대 유전자학이나 인공지능, 대량살상무기 등의 윤리적 법적 한계를 제한하는 것도 가능한 일일까? 부활절 날의 눈처럼 엉망진창(as messy as Easter snow)이 된 슬로프를 벗어나 노곤해진 몸을 호텔 욕탕에 담그고 이러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삼십여년 전 삼년간의 영국 근무를 마치고 귀국하여 여덟살과 여섯살이 된 딸들을 할머니에게 인사시키고 산소도 찾을 겸 하여 전주행 기차를 탔다. 런던 남서쪽 Richmond Park의 East Sheen Gate 아래  ‘Sheen Mount Primary School’ 을 유치반 부터 3년 다닌 큰 딸에게 차창 밖 풍경을 가리키며 영어로 물었다. “What do you think of the scenery out there?” 내 나름으로는 이제 꽤 발전된 한국의 시골 풍경과 나무가 무성한 산을 보고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했었는데 즉각 돌아온 대답은 ‘Messy’였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러했다. 우리의 강산은 사람 손이 간 곳은 모두 부활절 날의 눈처럼 엉망진창이 되고 만 것이었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라는 말도 생각나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엉망진창이 된 우리의 자화상은 선진국의 잘 정돈된 모습에 익숙해진 어린이 눈에 더 잘 보인 것이었다.

요즘도 국내를 여행하다 보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가리는 무질서하고 어지러운 형태의 건축물들과 온 국토를 도배질한 흉악스럽게 크고 흉측한 색깔의 간판들이 눈과 마음을 피곤하게 한다. 이를 그대로 두고 ‘관광 한국’을 홍보하는 이들의 배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들이 선진국 연수나 시찰을 안 해 본 것도 아닐 터인데 문제 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소이는 어디에 있을까. LA의 주요 거리인 Olympic Boulevard 연변의 한인 타운을 이루고 있는 지역도 규제를 피해가며 흉악한 간판들이 많이 늘어서 있어 도시 미관과 한인들의 이미지를 많이 훼손하고 있다. 뜻있는 한인단체들을 중심으로 간판미화 캠페인을 벌이기도 하지만 잘 개선되지 않는다.

어둠을 헤쳐가며 달려 온 셔틀버스가 이윽고 번잡한 속세로 돌아온다. 잠실 네거리에 정차한 버스에서 무거운 부츠가방을 찾아 등에 업고 플레이트는 어깨에 매고 차를 찾아서 가로등 아래를 부지런히 걷는다. 소시민의 이런 작은 행복도 머지않아 이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사라지겠지 하는 생각에 갑자기 몸이 떨려 온다.

<끝>

/최병효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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