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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과 바울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성경 속 인물 가운데 하느님의 뜻을 가장 크게 왜곡시킨 사람은 누구일까?
누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구약에서는 다윗이요, 신약에서는 바울’이라고 말하겠다.

다윗은 언제나 신의 뜻을 묻고 신의 뜻대로 순종하고 산 순결한 신앙인으로 오인하기 쉽지만, 그것은 주술적이고 의존적인 기복 신자들이 만들어 놓은 아전인수식 종교적 허상에 불과하다. 그는 ‘야훼’를 하느님이라고 하는 본래의 신과는 전혀 다른 자신들만을 수호하는 ‘민족 신’으로 격하시킨 사람이다. 다윗과 그 왕조가 조성한 신 ‘야훼’는 민족의 수호신이요, 전투의 신이요, 질투의 신이며, 잔인하고 편애하는 그들만의 신일 뿐이었다.

다윗 왕조는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과 자기희생의 신이었던 ‘야훼’를 정의가 없는 편애하는 우상으로 왜곡시키고 말았다. 당시 고대 근동 지역의 왕들은 저마다 자신을 지켜 줄 수호신을 섬기고 있었다. 강자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 저마다 자신들의 수호신을 우상으로 삼은 것이다. 이는 강자들이 신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윗 왕조의 죄악은 인류의 보편적 사랑의 신 ‘야훼’를 자신들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인 ‘민족의 수호신’으로 격하시킨 데 있다. 오직 다윗의 후손과 이스라엘만을 섬기는 종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다. 이들에게 정의란 찾아볼 수가 없다.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 야훼’란 오직 선민의식으로 무장된 자신들만의 기득권 논리일 뿐이다. ‘야훼’는 특정한 민족과 개인만을 편애하여 그들의 탐욕을 위해 ‘심지 않는 곳에서 거두는’ 그런 기적을 남발하는 신이 아니라 ‘있을 것을 있게 하시는 불가사의한 영’이시며, 누구에게나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이에 응답하는 신이다. 보편적인 사랑과 자기희생으로 온 세상에 편만이 역사하는 인류 전체의 신인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보편적 인류애보다는 다윗 왕조의 편협한 민족주의의 전통을 따랐다. 다윗 왕조가 섬기는 일개 민족 신으로서의 야훼를 유일신으로 주장하였으며, 예수의 죽음 이후에도 다시 메시아가 나타나 로마를 멸망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할 것으로 믿었다. 자신은 이방인을 메시야 왕국으로 인도하는 첨병으로서, 스스로 사도의 역할을 자처하기까지 하였다. 바울은 세상을 ‘장망성(將亡城)’에 비유하며, 종말론을 주장하였다. 예수의 재림이 자신의 당대에 곧바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견한 것이다. 예수의 재림과 함께 이스라엘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되고 로마는 멸망할 것이라 주장하였지만 백 년, 천년, 무려 이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는 재림하지 않았다. 로마 역시 예수가 재림해서 멸망한 것이 아니었으며, 이스라엘 또한 예수의 재림으로 인해 해방된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예수의 직접적인 제자가 아니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만의 주장일 뿐이다. 다른 제자들 누구도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 줄 증거가 없다.

바울신학의 오류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만을 강조하고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등한시한 데 있다. 그는 예수에게 친히 가르침을 받은 바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방인의 전도를 위하여, 유대인의 전통적 율법을 꺼리는 그들을 배려하고자 ‘율법의 행위’보다 ‘믿음’이 더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교리는 완전하지 못했다. 오직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면, 예수 이전의 인류는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모두 지옥행일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모순에 빠지고 만다.

또한 ‘종은 주인에게 충성하라’라고 함으로써 노예제도를 인정하였고, ‘아내는 교회에서 잠잠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라’ 함으로써 남녀 불평등을 조장하였다. 

바울은 다윗 왕조가 조작한 야훼를 믿었으며, 예수가 부활하여 통치하는 메시야 왕국의 재건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런 바울신학의 오류는 이천 년 기독교 역사가 이미 충분히 증명하였다. 종교 역시 인간이 만든 사유의 세계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종교는 반드시 인간의 행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윤리와 도덕적 삶을 토대로 해야 하며, 인류의 보편적 삶에 의해 검증할 수 있는 신뢰가 있어야 한다. 개인과 특정인에게만 적용되는 종교적 주장은 관념론에 불과하며, 선민의식으로 포장된 반지성주의일 뿐이다. 종교는 ‘확신’에 찬 신념의 세계가 아니라 ‘신뢰’로서의 믿음이다. 믿음이 ‘신뢰’일 수는 있어도 ‘확신’일 수는 없다. 한국교회의 치명적 죄악은 비판과 검증의 노력 없이 맹목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확신의 죄’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40여 년을 보수주의 교회에서 세뇌당하고 살았다. 무지에서 비롯된 맹목과 맹신의 결과였다. 정통 기독교 국가에서 주장하는 신학 서적이나 종교학 서적, 몇 권만을 읽어 보았어도 대한민국 보수 기독교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믿고 싶은 대로 믿었던 결과에 대한 보상은 인생을 송두리째 사기당한 것 같은 참담한 상처와 배신감뿐이었다. 내가 대한민국의 보수주의적 목사와 기독교인을 혐오하는 까닭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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