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우울했던 대학 시절 이야기다. ‘이상형의 남자’를 만났다고 좋아 죽던 ‘K’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여겼던 남자 ‘J’에게 매우 당돌하고 적극적인 구애를 하였다. 그 때문에 문과대 내에서는 어떤 여학생도 감히 그 남학생의 주변을 얼씬하지 못하였다.
그 남학생의 환심을 사기 위한 그녀의 뇌물성(?) 공세가 등록금을 추월할 정도라는 소문까지 돌았을 만큼 자못 그녀의 애정 공세는 가히 살신성인의 자세였다.
당시는 여학생의 선제적 구애가 매우 드문 일이어서 동학들 사이에서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그들의 애정행각이 널리 회자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도 죽고 못 살겠다는 그 남자는 우리 남학생들 사이에선 거의 존재감이 없는 그야말로 ‘듣·보·잡’이었다. 그저 하얀 가래떡같이 생긴 창백한 얼굴의 큰 키에 공부 못하고 존재감 없는 외톨이에 불과하였다. 이성에 무지하고 눈치마저 없었던 나는 여학생들이 대체로 그런 스타일의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중년의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 그사이 숱한 여자들로부터 받았던 괄시와 냉소는 내게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어쨌거나 졸업과 동시에 그들의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그들의 관계가 깨지고 말았다는 슬픈 소식이 전해져 왔다. 세상 물정 모르던 철없던 나는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이상형의 남자를 만났으면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아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거늘 어째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무슨 까닭에 그렇게도 빨리 이혼을 하게 되었단 말인가? 그 후로도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 내가 결혼을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나의 지인 가운데 30년 넘게 싸우며 사는 부부가 있다. 여자의 이상형은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자상한 남자’였다. 반면 남자의 이상형은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헌신적 여성’이었다. 둘은 상대가 전혀 자신의 이상형이 아니라며, 한결같이 자신의 결혼 생활은 실패하였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작 둘은 이혼할 의사는 결코 없어 보였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이상형만을 고집하는 경우를 왕왕 본다. 과연 세상에이상형의 사람이 있기는 하는 것일까? 그러나 개중에는 종종 이상형의 배우자를 만났다는 사람을 드물게나마 보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이상형의 배우자를 만났다는 사람이 행복하게 잘 산다는 이야기를 나는 아직 전해 들은 바가 없다. 내가 너무 과문한 탓일까?
그 까닭이 무엇일까 늘 궁금했는데, 나는 위 사례의 부부를 보며 깨달았다. 그것은 서로에게 상대가 자신의 이상형이 되어 주기만을 바랐지, 자신이 상대의 이상형이 되어 줄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설령 이상형의 상대를 만났다 한들 내 눈에 이상형인 사람이 남의 눈엔 안 들 수가 있었겠는가? 그를 내 것으로 붙잡아 두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법이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완벽하게 묶어두었다고 방심한다면 그것은 크나큰 오산이다. K의 결혼 생활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또한 상대가 나의 이상형이 되어 주기만을 바랐을 뿐 내가 상대의 이상형이 되어 주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었던 것이었다. 결혼이란 만족할 만한 이상형의 배우자를 만나 천국 같은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나와 다른 반쪽을 만나는 것인 만큼, 내 만족의 연속을 위해서는 내가 상대의 반쪽이 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일이다.
결혼은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기에 앞서 내가 상대의 기대에 성실하게 부응하며, 상대의 부족한 부분을 먼저 채우려는 나의 희생이 전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미 이천오백 년 전 공자는 인간관계의 욕망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였다.
“군자는 섬기기는 쉽지만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기쁘게 하기를 도(道)로 하지 않으면 기뻐하지 않으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선 상대가 가진 장점 하나에도 만족한다.”
君子易事而難說也. 說之不以道, 不說也, 及其使人也, 器之.
“소인은 섬기기는 어렵지만 기쁘게 하기는 쉽다. 기쁘게 하기를 비록 도(道)로 하지 않더라도 기뻐하며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선 상대에게 모든 것이 완벽하기를 요구한다.” 小人難事而易說也. 說之雖不以道, 說也, 及其使人也, 求備焉.
오늘은 모처럼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고 나니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졸지에 사라지고 말았다. 내 주변에 소인이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내가 군자가 되지 못해서일까? 근신하고 또 경계해야 할 일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