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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연호 레이와의 출처인 시가집 만요슈 매화 노래는 730년 정월 13일 타비토라는 이름의 대신의 집에 모인 귀족들이 정원에 핀 매화를 감상하며 부른 노래들로 그 배경이 된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서는 주민과 관광객 천여명이 인간 띠로 레이와 문자를 만들어 새 천황의 즉위를 축하했다고 한다.
약 1,300년 전 당시의 다자이후에는 규슈지방 전체를 다스리는 오호미코토모치노쓰카사 大宰府라 하는 관청이 약 500년 동안 있었고 이로 인해 번영하였다고 한다. 특히 다자이후텐만구는 헤이안 시대인 903년에 사망한 학문의 신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845-903를 받드는 일본 전역에 있는 텐만구 신사의 총본산으로 일본의 신사 가운데 규모가 크고 웅장한 편이며 수령이 오래된 매화나무들이 있어서 더욱 인상적이다.
텐만구는 학문의 신을 모시는 신사여서 입시철마다 합격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다자이후 텐만구에는 매화나무가 매우 많은데 수도 교토에서 먼 변방의 다자이후로 좌천될 때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덕과 학문을 흠모한 그의 저택의 매화들이 하루만에 다자이후까지 허공을 날아와서 뿌리를 내렸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이 매화들을 토비우메라 부른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헤이안 시대 제일 가는 천재라고 칭송받은 인물로 격은 낮지만 학자 가문인 스가와라 가에서 태어나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재상급인 우다이진(右大臣)까지 올랐다. 그러나 당시 오랫동안 천왕가의 외척으로서 실세였던 후지와라 가문의 견제로 먼 규슈 다자이후로 좌천된 것이다.
그가 쿄토를 떠나던 날에 지었다는 유명한 다음과 같은 와카가 있다.
東風(こち)吹(ふ)かば 匂(におい)おこせよ 梅(うめ)の花(はな) 主(あるじ)なしとて 春(はる)を忘(わす)るな
동풍 불거든 꽃향기 보내다오 매화꽃이여 주인이 없다 해서 봄을 잊지 말지니…
이 비매(飛梅)는 경내의 다른 매화들보다도 먼저 꽃이 핀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에서 죽었을 때 그 원한과 억울함이 깊어서 운구하던 소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덕분에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신 다자이후 텐만구를 비롯해 쿄토의 기타노 텐만구 등의 텐만구 신사에 가보면 소 동상이 많다.
아픈 사람은 자신의 아픈 곳과 같은 소의 부위를 만지면 병이 낫고 머리나 뿔을 만지면 지혜롭게 된다고 한다. 다자이후 텐만구- 좌우 끝에 그 유명한 매화나무들이 보인다.
연호란 왕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칭호로 대년호(大年號) 또는 원호(元號)라고도 부르는데 기원전 140년 중국 한무제가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후 중국 역대 왕조는 물론 한국과 베트남 등 한자 문화권으로 확대됐으나, 아직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연호와 관련된 사전의 설명은 아래와 같다.
기원전 140년 중국 한나라 무제 때 유학자인 동중서의 건의로 건원(建元)이란 연호를 채택한 이래 제왕이 즉위한 해부터 특정 연호 뒤에 숫자를 붙여 연수를 세는 전통이 세워졌다. 하늘의 뜻인 천문을 읽고 책력(冊曆)을 정하듯, 제국 신민의 시간까지 다스리겠다는 발상의 산물이었다. 연호는 황제만 쓸 수 있었기 때문에 조공을 바치는 제후국의 왕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수 없었다.
기록상 한반도의 최초 연호는 고구려 광개토태왕이 사용한 영락(永樂)이다. 광개토태왕 비문에 따르면 391년이 영락 1년에 해당한다. 백제가 연호를 사용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라와 고려는 독자적 연호를 상당 기간 썼다.
중국의 조공국을 자처한 조선은 당연히 독자적 연호를 쓰지 않았으며, 대한제국이 선포되면서 개국, 광무(光武), 융희(隆熙)를 썼으나 1910년 한일강제합병으로 융희가 마지막 연호가 됐다. 중국은 1912년 청이 무너지면서 선통(宣統)이 마지막 연호가 됐다.
선통제 푸이는 1932년 일본의 괴뢰국가인 만주국 황제가 되면서 다시 강덕(康德)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나, 1945년 일제의 패망과 함께 만주국도 멸망해 그 연호마저 사라졌다. 중국 명·청시대 황제는 죽고 난 뒤 부여하는 묘호나 시호를 쓰지 않고 연호로 불렸는데, 그 시조가 홍무제 주원장이다. 명의 마지막 황제가 묘호인 의종보다 연호를 딴 숭정제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다’
나루히토 천왕은 도쿄의 가쿠슈인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영국 Oxford대학교 Merton College에서 템즈강 수운 관련 역사학을(1983-85) 공부하였다. 내가 84년 3월 런던에 부임 후 그 해 여름에 Merton College를 찾아 갔더니 사방이 기숙사, 교회, 식당, 교수실 건물로 둘러싸인 유서 깊은 Quad (quadrangle, 4각형의 안뜰)에서 일본대사관의 히메노 서기관이 서성대고 있었다.
역시 옥스포드에서 수학한바 있는 그도 휴일에 그곳을 둘러보고 싶어 왔는데 여기 Merton에 나루히토 왕세자가 지금 수학중이라고 하였다. 나는 1976년도에 조선사람 최초로 Merton College의 member(학생, 교수 포함 통칭)가 되었었는데 일본 왕세자가 동문이라니 반가웠다.
<계속>
/최병효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