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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고문서의 이해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대만에 있는 국립 정치대학에서 대학원생을 상대로 이번 학기 수업을 맡게 되었다. 개설된 강좌는 ‘한국 고문서’에 대한 연구이다.

현지에서 실시간 ‘대면 강의’와 ‘비대면 강의’를 동시 진행할 수 있도록 학교 측에서 지원하여준 덕분에 비록 본교의 한국학과 대학원생은 15명에 불과하였지만, 타 대학의 청강생이 대거 참여하여 수강생 총원이 230여 명에 달하였다.

수강생 중에는 석·박 과정의 대학원생뿐만이 아니라 중국의 북경대와 청화대, 미국의 하버드대 등의 교수들까지 대거 수강 신청을 하여 ‘밥보다 고추장이 더 많은’ 격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모두에게 외면받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조선의 고문서’에 대해 이렇게까지 많은 관심을 보여준 데 대하여 가슴이 전율하도록 큰 고마움을 느꼈다. 한국을 대표하여 조선의 고문서를 알리는 일이니만큼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충만하였지만, 한편으론 역사와 전통에 관한 자국의 학문을 외면하는 우리의 풍토에 대하여 씁쓸한 자괴감이 들기도 하는 등 심경이 참으로 복잡다단하였다.

첫 강의를 마치고 통역을 담당한 한국학 교수와 성대하게 환대해 준 동학들과 더불어 매우 유쾌한 시간을 가졌다. 어쨌거나 내겐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시간이 되었지만, 짧은 일정으로 인하여 마음은 몹시도 분주하다.

덜렁대지 말아야지, 덜렁대지 말아야지 속으로 숱하게 다짐을 하였어도 여전히 실수투성이인 것은 그놈의 급한 성질 탓일 것이리라. 좀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수강생들이 잘 이해를 했을까 몹시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강의를 마치자마자 원근각처에서 참여한 수강생들의 질문과 비대면 동학들의 폭풍 댓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일찍이 한국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이 기쁨은 불투명한 미래를 걱정하여 한국학을 중도 포기했던 나의 옛 동학들은 결단코 알 수가 없을 것이리라. 오늘은 내 생애에 존재만으로 나의 삶을 긍정했던 몇 안 되는 날이 되었다.

강의를 마치고 함께 한 동학들과 더불어 참으로 오랜만에 월나라 구천이 오나라를 치러 갈 때 군사들과 마셨다던 술이라는 ‘소흥주(紹興酒)’를 결연한 심정으로 마셨다. 술 취한 새우 ‘취하(醉蝦)’와 동파육을 곁들며, 열띤 토론에 심취하다 보니 비록 ‘유상곡수(流觴曲水)’와 같은 운치는 없었을지라도 “‘시청지오(視聽之娛)’가 지극하여 ‘신가락야(信可樂也)’로다.”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전공 학생과 참여 교수들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카로운 질문에 매우 당혹스럽기도 하였지만, 내심 이런 기쁨을 여유롭게 즐기는 나를 보노라니 집 나가 개고생하던 자존감이 마침내 제 길을 찾는 듯하였다. TV ‘진품명품’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귀한 자료들을 아낌없이 공개하였다. 이번 학기에 수강한 동학들은 한국에는 이런 자료가 매우 흔할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 우리 집안 조상들의 ‘고신(告身)’과 ‘추증 교지’ 등, 약 10대에 걸쳐서 두 대만 빼고 문·무과 과거에 급제한 ‘홍패’와 ‘백패’를 유감없이 자랑할 것이다. 아마 수강생들은 내가 매우 뛰어난 유전자를 가진 사람으로 착각할 것이다. 한국 사회에선 남자 키가 170이 안 되면 ‘9급 장애인’인 루저에 해당하는 줄은 꿈에도 모를 터, 새로운 숙제를 기쁜 마음으로 안고서 잘 놀며 쉬다가 기어이 살아서 돌아가겠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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