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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이야기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이름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지금은 고인이 된 ‘앙드레김’이다. ‘옷 로비 사건’ 당시 재판정에서 했던 유명한 일화가 ‘제 이름은 김봉남이에요’라고 했던 말이다. 이미지를 먹고 사는 디자이너로서 당시의 일은 그에게 일생일대의 수치스러운 사건이었을 것이다. 하물며 나와 같은 범용한 인생도 이름 때문에 가끔은 낭패를 볼 때가 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박 황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면 어떤 짓궂은 인사는 ‘그럼 말짱 황이네요’하고 농을 건네곤 한다.

‘말짱 황’이 뭔 말이냐고? ‘말짱 황’이란 말을 이해하려면 우선 ‘봉이 김선달’을 알아야 한다. ‘봉이 김선달’의 ‘선달(先達)’이란 조선 시대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아직 보직(補職)을 발령받지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을 이른다. 또한 ‘한량(閑良)’이란 무과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아직 보직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을 말하는데, 모두 임란 이후 서북 출신의 홀대와 함께 무과 급제자를 대량 양산하다가 생겨난 병폐들이다.

한편 ‘한산(閑散)하다’는 말은 ‘한량(閑良)’과 ‘산관(散官)’을 더하여 이르는 말로서 ‘한량’이 과거에 급제하고 자리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면 ‘산관’은 보직은 있으나 주어진 업무가 없는 상태에 있는 관원을 이른다. 이 두 가지 경우를 빗대어 ‘한산하다’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암튼 그런 김선달이 우연이 장 구경을 하다가 닭 파는 가게 앞에서 몸집이 크고 좋은 닭 한 마리를 보고는 주인에게 이거 ‘봉(鳳)이 아니냐’고 능청스럽게 물었다. 주인이 처음에는 아니라고 답하였으나 연신 어디서 났느냐며 호들갑을 떨면서 강요하듯 재차 물어보자 얼떨결에 수긍하고 만다. 김선달은 이 귀한 걸 꼭 자신에게 팔라며 통사정을 하여 마침내 여섯 냥의 거금을 주고 닭을 사게 된다.

김선달은 그 길로 관아로 달려가서 사또에게 ‘봉’이라며 갖다 바친다. 닭을 봉이라고 바치니 화가 난 사또가 곤장을 치게 되고, 이에 자신은 억울하다며 닭 장수에게 속아서 샀노라고 고변하여 닭 장수를 잡아들이게 된다. 꼼짝없이 사기죄로 걸려든 닭 장수에게 닭값은 물론 곤장 맞은 배상까지 100냥이나 받아내게 된다. 대동강물 팔아먹었다는 김선달이 바로 ‘봉이 김선달’로 불리게 된 사연이다.

이른바 새 중의 왕으로 불리는 ‘봉황(鳳凰)’은 수컷과 암컷이 합쳐서 만들어진 말인데, 수컷을 ‘봉’이라 하고 암컷을 ‘황’이라 한다.

흔히 ‘봉 잡았다.’라는 말은 원래 매우 귀하고 훌륭한 사람이나 일을 얻었다는 뜻이었는데, 봉이 김선달의 사례에서처럼 속이기 쉽고 이용하기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뜻으로 더 많이 쓰이기도 한다.

그런데 같은 봉황이라도 ‘봉 잡았다’는 말은 운수가 좋다는 뜻으로 쓰이나 ‘황 잡았다’는 말은 운수가 나쁘다는 뜻으로 쓰였다. 그 이유는 ‘황’이 암컷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짱 황이다’라고 하는 말은 기대했는데 실망하게 되었다는 속뜻이 담겨있는 비속어인 셈이다. 유가적 남존여비 사상의 잔재들이다. 

이처럼 내 이름이 종종 놀림감이 되고 마는 그런 슬픈 사연이 있어 이십여 년 전 고심 끝에 자호를 만들게 되었다. ‘자줏빛 노을 아래 밭에 김을 매다’라는 뜻으로 ‘운전어자하(耘田於紫霞)’라는 문장을 만들고 그 가운데 주요 의미인 노을 ‘하(霞)’와 밭 ‘전(田)’자를 떼서 ‘하전(霞田)’이라는 호를 지었다.
그러므로 ‘하전(霞田)’이라는 자호의 의미는 ‘노을에, 석양에, 해 질 녘에 밭에 김을 매다’라는 뜻이 담겨있는 말로서 늦은 나이에 만학하는 자신의 처지를 빗댄 말이다.

스피노자가 말한 바와 같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한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리라”라고 했던 명구와도 일정 부분 맥락이 상통하는 듯하고 헤겔의 법철학 서문에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어둠이 내려야 비로소 날개를 펴고 난다.”라고 했으니 이 말의 의미와도 일정 부분 정서가 교감이 된다.
지혜라는 것도 어떤 면에서는 고통을 겪고, 실수를 하고, 젊은 날의 열정도 식고, 가진 것을 내려놓고, 일련의 아집과 집착이 풀어져서 세상에 대한 관조가 시작될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어쨌거나 부모가 주신 이름은 놀림이 되고 스승이 지어준 ‘덕암(德嵓)’이라는 호는 의미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자신의 처지와 형편을 빗대어 분수에 맞는 의지를 나타내는 호를 지음으로써 스스로 위안 삼는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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