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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북조시대 「송사(宋史)」에 나오는 이야기다. ‘송계아(宋季雅)’ 라는 사람이 퇴임을 앞두고 이사를 하면서 시가가 백만금(百萬金)에 불과한 집을 오히려 웃돈을 얹으며 천만금(千萬金)이라는 거금에 샀다 한다. 그 집은 전망이 좋은 쾌적한 집도 아니요, 투자 가치가 높은 역세권도 아니었다.
그저 다름 아닌 ‘여승진(呂僧珍)’이라는 사람의 옆집이었을 뿐이었다. 여승진은 온화인 인격의 청백리로서 당대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었다. 여승진이 그 까닭을 물으니 송계아가 말하기를 “백만금은 집값이고 천만금은 당신의 이웃이 되는 값”이라 하였다.
‘백만매택 천만매린(百萬買宅 千萬買隣)’이라는 고사가 전해지는 대목이다. 이는 ‘백만금으로 집을 사고, 천만금으로 이웃을 산다.’라는 뜻으로 집을 구할 때는 좋은 이웃을 선택하여야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다. 거처할 곳을 선택할 때는 반드시 먼저 이웃을 살펴보고 결정하라는 ‘거필택린(居必擇隣)’의 고사가 바로 이에 해당하는 말이다. 이제는 전통 시대의 농경사회처럼 여승진 같은 사람과 이웃할 수 없는 복잡 다변한 사회구조가 되어버렸지만, ‘여승진’일 수도 ‘송계아’일 수도 없는 나의 처지가 매우 딱하다. 좋은 이웃을 만나고자 하는 소망은 사람이면 누구나가 갖는 인지상정의 바램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좋은 이웃인지 혐오스러운 이웃인지에 대한 판단은 매우 객관적이고 도덕적인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일이다. 대개의 사람은 자신은 언제나 선량한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상대와 이웃은 무례하고 혐오스러운 ‘가해자’일 것이라고 단정 지으며 매서운 경계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는다. 나 또한 이러한 사고의 오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생임을 밝혀 둔다.
그러나 ‘좋은 이’웃과 ‘불편한 이웃’의 차이에 대한 변별은 자신의 권리와 타인의 권리가 충돌할 때 발생한다. 이웃과의 사이에서 권리의 충돌이 발생할 때 자신의 권리를 먼저 절제할 줄 안다면 적어도 이런 류의 사람은 좋은 이웃이 되기에 충분한 사람이다. 반면 자신의 권리를 행사할 때 이웃의 피해나 고통을 고려하지 않고 타인의 권리에 둔감한 사람이라면 이는 혐오스러운 이웃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춘 사람이다. 최근에 나는 ‘주택임대차보호법’이라는 매우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법 때문에 금전적 손실은 물론이고 엄청난 정신적 고통을 겪었다. 전에 살던 집을 혹자에게 전세를 주었는데 참으로 고약한 세입자를 만나 상상조차 못 해본 ‘임차인’의 갑질과 수모를 견뎌야만 했다. 4년 전 계약 시, 자신의 어려운 처지의 경제적 사정을 호소하기에 동정심에 미혹되어 매매가의 절반밖에 안 되는 금액으로 그 지역에서는 가장 싼 가격에 임대 해주는 선행을 베풀었음에도 불고 하고, 계약만료 시점이 이르자 뜻밖에도 임차인의 어처구니없는 요구와 횡포에 시달리며, 온갖 수모와 고초를 당하였다.
심약한 아내는 분쟁을 싫어하고 면 전에서의 언쟁을 두려워하기에 임차인의 상식을 초월하는 무례하고 턱없는 요구조건을 모두 수용해주고 말았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는 흉악한 인생을 만난 것이다. 이런 흉악한 인생을 상종하기 싫어 상식을 파괴하는 요구에 그저 순순히 응하고 마는 나와 아내야말로 진정한 ‘사회적 약자’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마 사회적 약자가 아니라면 반드시 ‘사회적 호구’일 것이다. 다시 기억하여 고통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 싶지만, 돌이켜보니 나 같은 모질이가 세상에 또 있을까 싶어 자꾸 한숨만 나온다.
“나는 인류를 생각하면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지만, 이웃만 생각하면 혐오감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라고 했던 러시아의 어느 작가의 말에 지극히 공감이 간다. 예수처럼 원수 같은 이웃을 사랑할만한 자비도 없거니와 공자처럼 남에게 인의 덕을 끼칠 아량도, 도량도, 역량도 없는 나와 같은 범용한 인생은 그저 염치와 체면만을 중시할 뿐, 불편한 이웃은 오직 피하고 싶은 혐오의 대상에 불과하다.
굳이 이웃의 인격과 교양과 상식에 대해 비난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다.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 인간사 어디에나 비상식적 일들과 몰상식한 인간들은 반드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은 나의 상식을 초월하는 일들이 도처에서 발생한다. ‘안중근은 영웅이 아니라 살인범이다.’라거나 ‘유관순은 허구의 인물이다.’, ‘정신대는 자발적 매춘이다.’ 이런 정도는 약과에 불과한 것일까? 일국의 대통령이라는 자는 ‘우리 민족은 세계사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했다’라는 망발을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불편하고 혐오스러운 이웃은 방송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페북의 세계에도 있다. 40년간 민심을 연구했다는 어느 정치학자는 “민주당의 민심은 이재명이 아니라 ‘수박’에게 있으며, ‘박지현’이 같은 청년이 민주당의 희망이다.”라고 말한다. 어디 이뿐인가? 정신 빠진 목사들은 세상에 또 얼마나 많단 말인가? 신이 마치 자신의 전유물인 양 착각하는 몰지각한 목사와 맹목적 종교인들은 우리 사회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백해무익한 사회악이다. 모두 다 자기 집 뒷마당이나 조금 파보고 지구의 지질을 다 안다고 만용을 부리는 자들이다. 언급조차 민망한 인격체들이다. 이런 류의 주장이 상식이라면 나의 상식은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자고로 어려서는 ‘부모’ 잘 만나는 것이 복이요, 젊어서는 ‘임자’ 잘 만나는 것이 복이요, 늙어서는 ‘이웃’ 잘 만나는 것이 복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