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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산악인 조지 멀로리는 산을 왜 오르느냐는 질문에 ‘산이 거기에 있어서’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나는 왜 산에 오르려는 것인가?
좋은 풍경을 위해서~, 심신의 수양을 위해서~, 동호인과의 친목을 위해서~,
모두가 일리 있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의 궁극적 목표는 아니다.
당나라의 문장가 유우석(劉禹錫)은 그의 작품 「누실명(陋室名)」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산의 가치는 높이에 있는 것이 아니요, 신선이 살 때 명성이 있는 것이다. 물의 가치는 깊이에 있는 것이 아니요, 용이 살 때 신령해지는 것이다”
산부재고 유선즉명 - 山不在高 有仙則名
수부재심 유룡즉령 - 水不在深 有龍則靈
내가 산수와 자연을 통하여 얻고자 하는 것은 멋진 승경과 심신의 안정이 아니다.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는 “진정한 여행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그것, ‘새로운 시각을 갖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옛 선현들은 말하기를 ‘술이 있으면 신선을 배울 것이요, 술이 없으면 부처를 배울 것이라’ 하였다. ‘유주학선(有酒學仙)’이요, ‘무주학불(無酒學佛)’이라.
오늘 온라인 세상에서 만난 친구 20여 명과 함께 북한산을 첫 등반하고서 ‘산적동호회’를 조직하였다. 우리 산적회의 정식 명칭은 ‘학불선(學佛僊) 산악회’이다.
그저 행인의 주머니나 넘보고 지나가는 나그네의 보따리나 터는 그런 쪼잔한 산적쯤으로 오해하지 마시라. 비록 활빈당을 꿈꾸는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의적은 아닐지라도 ‘석가의 철학’을 털고 ‘신선의 풍류’를 빼앗는 그런 ‘낭만 산적’이 되고자 하는 조직이란 말씀이다. 더 나아가 나그네의 마음을 빼앗고 행인의 지혜를 털어내며, 양민의 사랑을 침노하는 ‘풍류 산적’이 되고자 하는 조직이란 말씀이다.
일찍이 퇴계는 ‘청량산’에 들어가 산을 유람하고 또 거기서 공부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책을 읽는 것이 산을 유람하는 것과 같다고 하는데
이제 와서 보니 산을 유람하는 것이 독서와 같구나.
온 힘을 쏟은 후에 스스로 내려옴이 그러하고
얕고 깊은 곳을 모두 살펴야 함이 그러하다네.
讀書人說遊山似, 今見遊山似讀書.
工力盡時元自下, 淺深得處摠由渠.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사람과의 인연을 이렇게 노래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정말 어마어마한 일이다. 산악회를 통해 소중한 만남을 갖게 되고 그것이 특별한 인연으로 이어지는 세상 소풍이 참으로 즐겁다. 책에서 보지 못한, 도서관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었던 깊은 공부의 참맛을 깨닫게 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내게는 ‘브리태니카 백과사전’과 같은 신세계의 문화 충격이었다.
산행의 과정에서 좌충우돌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하였으나 그것 또한 조직을 단련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그렇듯 인과관계의 호불호가 있겠지만 특별히 몇 사람을 마음에 담아둔 것이 매우 기쁘다. 마치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큰 부자가 된 기분이다.
철학자 안병욱 박사는 「산의 철학」이라는 수필에서 “산에 가는 것은 의사 없는 종합병원에 입원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야말로 최상급 산의 예찬이라 할 만하다. 또한, 독일의 어느 시인은 ‘네 영혼이 고독하거든 산으로 가라.’고 하였다. 육체와 정신 건강을 위해 이보다 더 좋은 수련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쩌면 “우리가 정복하고자 하는 것은 산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산에서 만나는 고독과 악수하며 그대로 산이 된들 또 어떠리~~”
‘학불선산악회’의 무운 장수를 기원한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