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길을 나서다(1)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최병효 칼럼
봄이 완연한 구례 화엄사를 오랫동안 거닐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산 위쪽으로 인도승려 ‘연기’ 가 화엄사를 짓기 전에 토굴을 파고 가람을 지어 수행하며 화엄법문을 설법하였다는 연기암으로 가는 길이 보였다. 4키로 정도는 되는 산길 양쪽은 나무 터널을 이루고 있었고 도중에 여러 개의 암자로 가는 또 다른 길들이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너무나 한적하고 아름다운 숲길에 감탄하며 연기암에 도착하니 단풍나무 위 언덕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크다는 석조 문수보살상이 보였다.

산 아래로 섬진강이 보인다고 하나 비가 계속 내려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경내의 문수전 옆으로 오르니 사람 키 높이의 나지막한 철쭉나무에 핀 선홍색 꽃들의 비현실적 화려함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그 비현실적 화려함은 나무 위의 새빨간 꽃들과 그 아래에 일부러 깔아 놓은 듯 빗속에 떨어진 새빨간 꽃잎들과의 상호작용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장면은 마치 나무 위의 꽃들이 아래 거울 위에 반사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선명한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비 내리는 이 깊은 산사에서 이 화사한 붉은 꽃들은 누구를 맞으려고 그 아름다움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놓고 있단 말인가. 문수보살의 조화이런가. 

이럴 때 언뜻 떠오르는 장면은 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에서 게리 쿠퍼가 다리에 총을 맞아 더 이상 사랑하는 여인 잉그리드 버그만과 같이 갈 수 없게 되자 억지로 그녀를 보내며 좇아 오는 적들을 향해 땅에 엎드려 기관총을 조준하고 있을 때 들려오는 시 구절이다.  

“Don’t ask for whom the bell tolls, it may also toll for you”      
그러나 그 종소리는 이제 죽어야 되는 자를 위한 조종이니 이 꽃들에게  적절한 것은 아니리라. 이 화사한 벚꽃은 차라리 한하운의 "답화귀(踏花歸)"가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벚꽃이 피고 벚꽃이 지네 
함박눈인 양 날리네 깔리네 
꽃 속에 꽃 길로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꽃이 달빛에 졸고 봄 달이 꽃 속에 졸고 
꿈결 같은데 별은 꽃과 더불어
아슬한 은하수 만리 꽃 사이로 흐르네
꽃잎이 날려서 문둥이에 부닥치네
시악시처럼 서럽지도 않게
가슴에 안기네
꽃 지는 밤 
꽃을 밟고
나는 돌아가네“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인지는 모르나 귀거래사에서와 같이 고향으로,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인 자연으로, 우리들이 태어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일 듯 하니 결국 Meditation XVII로 돌아가는 셈이 아닌가. 내 생각 역시 자연의 모든 것은 영원히 순환한다는 윤회설(Karma)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요승화이귀진(聊乘化而歸盡)인 것이다.(천지자연의 이치에 만족하고 순응하여 살다가 생명이 다할 때가 오면 자연의 귀결에 맡기리라.-귀거래사의 마지막 부분 ) 연기암의 그 철쭉꽃은 우리나라에서 근래 조경에 무차별적으로 쓰이고 있는 유치하고 싸구려 느낌의 붉은 색이 아닌, 보기 드물게 고상한 새파랗다고도 할 수 있을 선명한 붉은 색이었다.

우리나라 TV색깔도 전의 유치한 색조에서 이제는 좀 더 나아졌지만 유럽이나 일본에서 보는 은근하고 격조있는 TV색깔만은 아직 못한 것 같다. 그런 색감 때문인지 특히 영산홍 등 우리 주변의 각종 철쭉꽃들의 색조는 그 진하고 단조로운 강렬함이 역겹기도 하여 나라의 격까지 떨어뜨리고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 마저 든다. 그에 비해 전통적인 진달래의 연분홍은 얼마나 세련되고 우아한가. 우리 벚꽃도 일본 벚꽃의 고상한 색조와 너무도 대비되게 단조롭고 싱거운데 새로 심을 때는 수양벚 처럼 나무 모양과 더불어 꽃 색깔도 좀 더 세련된 것을 심었으면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아무튼 연기암과 그에 오르는 긴 숲길은 나로서는 큰 보물을 발견한 셈이라 여행의 피로를 씻기에 충분하였다. 남원으로 올라가는 길에 구례 산동면 온천마을이 보였다. 마음의 피로는 풀었다고 하나 육체의 피로도 풀어줌이 좋을 것 같아 잠시 몸을 담그었다. 그날 밤은 남원에서 자고 다음 날 지리산 둘레길을 좀 걷고 실상사에 들린 후 기차편으로 남원에서 상경할 예정이었으나 남원 시내를 몇 바퀴 돌아도 숙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남원 교외 육모정 인근의 산채전문식당에서 30여가지의 산채로 지리산의 정기를 몸에 담았다. 밤 늦게 전주에 도착했지만 만족할만한 숙소를 찾아서 다행이었다.

<계속>

/최병효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