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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후에 광한루에 들러 잠시 춘향예술제 농악을 보고 나오니 바로 옆에 새로 지은 거창한 한옥단지가 보여 깜짝 놀랐다.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대규모의 새 한옥들이 집단을 이루고 있는데 ‘남원예촌’으로 시에서 인간문화재들에게 의뢰하여 작년에 조성한 한옥문화센터 겸 호텔이라고 하였다. 다음에는 그 한옥호텔에 꼭 묵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건너편에는 ‘종가집’ 이라는 전통 한식당도 있었다. 광한루를 나오니 또 다른 쪽은 요천이었다.
60여년전 초등 2학년 때인지 진달래꽃이 만발한 시기에 잠시 남원에서 지내며 징검다리를 건너고 놀던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요천 뒷산에 동네 아이들과 올라가 진달래를 따먹고 놀다가 누군가가 문둥이 온다 라고 소리쳐서 꽁무니가 빠지라고 도망쳐온 무서운 기억이 있다. 그때는 문둥병을 치료하려고 애들 간을 빼먹으니 조심하라는 얘기가 많았는데 어찌 무서웠던지 평생 그 악몽이 떠나지 않는다.
다시 지은 듯한 산 위의 정자가 멀리 보였다. 이제 나이 들어 간을 빼앗길 일은 없겠으나 그 산을 바라보니 간이 서늘해지는 기분은 여전하였다. 새로 놓은 다리로 요천을 건너가니 ‘춘향 테마파크’ 와 그 옆 언덕 위에 ‘심수관 도예전시관’ 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1일~16일까지 벌어진 남원성 전투에서 5만6천명의 왜군(사쓰마 번주 시미즈 요시히로의 대군으로 고니시가 선봉장)에게 맞서 싸운 1만명의 조선병과 백성이 몰살 당하고 기술자들은 대거 납치되었다.
당시 왜군들은 특히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을 많이 데리고 갔다. 당시 세계에서 제대로 된 자기(porcelain=1,300도 이상에서 고령토를 구운 반투명의 가볍고 강한 사기그릇)을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중국과 조선뿐이었는데 예술성 높은 조선자기 찻잔에 매료되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등 지배층의 필요로 많은 사기장들을 납치해 간 것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정유재란을 도자기 전쟁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그때 납치된 사기장 중에 심당길이 현 15대 심수관으로 이어지는 일본 가고시마 현(鹿兒島県, 전 사쓰마 번 薩摩藩) 사쓰마 야키 “심수관 요 窯” 의 시조가 된 것이다. 1867년의 메이지 유신으로 봉건제도가 사라지고 사쓰마 번이 없어지자 12대 심수관(심수관 1831-1906)은 독립된 가마를 열고 1873년 비엔나 만국박람회에 자기를 출품하여 국제적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그 후로 유럽에 본격적인 수출을 시작함으로써 높은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14대 심수관(심혜길 1926- )은 1998년 400년만의 귀향 행사를 남원에서 개최한바 있다. 금년에도 15대 심수관(심일휘 1959- )이 참석하여 도예전시관 앞에 제막한 14대 심수관의 흉상이 보였다. 여러 나라의 도자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세계적인 사쓰마 야키를 많이 보게 되어 뜻하지 않은 횡재를 한 셈이다.
나도 두어 점의 다른 사쓰마야키 화병을 가지고 있지만 높은 예술성을 유지하기 위해 25명 미만의 장인으로 운영한다는 심수관요의 작품들은 워낙 고가라서 수출보다는 대부분 내수에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정유재란 당시 사쓰마 북쪽 시가현(佐賀) 으로 납치된 또 다른 사기장 이삼평(李參平, 공주 또는 남원에서 납치)은 아리타( 有田 )에서 일본 최초로 자기를 생산하여 1650년부터 이미 유럽(화란)에 수출함으로써 일본자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아래 사찰들에서 분에 넘치도록 많은 보물을 한꺼번에 보았는데 남원에서도 뜻하지 않게 여러 보물을 만나게 되니 부자가 되어 돌아온 느낌이다. 역시 여행은 우리를 여러모로 풍요하게 해주는 것임을 확인한 기분 좋은 1박2일이었다. 시간상 몇 가지 아쉬움은 두고 왔지만 요천 옆에서 원조 남원추어탕까지 먹고 밤 기차를 탔으니 적의 만족할 만한 여행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끝>
/최병효 전 駐 노르웨이대사, LA총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