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말일파초회-末日破草會

‘말일파초회’는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에 모여 초서를 파(破)한다는 의미로서, 청명 임창순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간찰 초서’를 연구하고자 하는 전·현직 교수 28명으로 구성된 단체이다.

정식 명칭은 ‘한국 고간찰 연구회’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로 널리 알려진 전 문화재청장 유홍준 교수가 이사장으로 있으며 조선 팔도의 기라성 같은 ‘초서’의 대가들이 즐비하다.

최근에 모처럼 코로나 이후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하고 국내 답사를 시도하였다. 목적지를 향하는 버스 안, 4시간이 넘는 이동 중에도 마이크는 잠시도 쉬질 않는다. 구라의 대가들이 모인 탓에 ‘10초 이상의 침묵’은 무조건 방송 사고로 간주한다.

비록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간 숙녀의 옷자락’은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눈먼 천사인 안드레아 보첼리와 사라 브라이트만이 함께 한 ‘Time to say goodbye’의 이야기와 케니 G의 색소폰과 천상의 목소리 셀린디온을 이야기하였다.

다시 나킹콜의 ‘Autumn Leaves’에 얽힌 추억담과 아그네스 발차의 ‘기차는 8시에 떠난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모두가 감정이 격해졌다. 독일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의 한 젊은 레지스탕스가 조국을 위해 사랑하는 여인을 남겨두고 떠나며 돌아오지 않는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사연이 어느덧 박병천의 ‘구음 시나위’를 낳고 사물놀이 김덕수의 ‘장구’ 스토리와 함께 고구려 고분벽화의 해 신과 달 신을 상징하였던 이애주의 ‘춤’ 이야기로 이어졌다. 김수영의 시를 논하다 김지하와 함께 서대문교도소 수감 시절 통방을 위해 비둘기를 날리다 걸렸던 비사를 이야기하기도 했으며, 도원 유승국 교수를 독선생으로 모시고 주역과 동경대전을 배우던 섬망이 없던 시절의 그를 추억하였다. 이런 언어의 마술사들을 침묵케 한다는 건 국가적 재앙(?)이다.

님원 광한루에 이르자 전직 청장의 위력으로 굳게 닫힌 누각이 홍해의 기적처럼 열렸다. 일행은 누각에 오르자마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 많은 현판들을 읽어대기 시작했다. 직업병의 발호였다. 상촌 신흠, 옥봉 백광훈, 송강 정철, 김병연, 다산, 근대의 창랑 장택상에 이르기까지 거침없이 판독하고 나서는 홀연히 만복사지로 향하였다.

절터만 남은 텅 빈 들판, 아무런 볼 것도 없는 곳에서 무려 2시간의 현장학습이 이루어졌다. 서울대에서 동양 사학을 전공하신 불교계의 초서 대가 흥선 스님과 미술사 전공 이태호 교수의 불교 미술사 강의가 이어졌다. 고구려 소수림왕으로부터 시작된 삼국의 불교 양식 비교와 고려와 조선의 불교 차이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김시습의 금오신화에 나오는 만복사 양생의 저포기 신화로 이어지다가 마침내 선조의 명으로 율곡이 지은 김시습 평전에까지 이어졌다. 다시 구례로 가서 조선의 묘비 중 최초의 보물로 지정된 남원 윤씨 문효공의 신도비와 방산서원을 답사하며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정사와 야사의 이야기보따리로 하루해가 짧았다.

숙소인 춘향 호텔에서 답사 첫 밤을 맞이하였다. 비록 ‘춘향이’ 없는 춘향 호텔이었지만 나는 천행을 얻어 국제 퇴계학회 학회장이자 우리 모임의 정신적 지주이신 대학자 이광호 선생의 룸메이트가 되어 승은(?)을 입는 영광을 안았다. 야심한 시각의 호텔 방, TV를 안 보신다는 노학자께서 모든 불을 소등하고, 바닥에 정좌를 하신 채 내게 물으셨다. “박 선생은 어떤 경전을 좋아하시나요?”

“예, 저는 ‘주역의 계사전’과 ‘중용’을 좋아합니다.”

곧바로 나지막한 음성으로 어둠 속에서 중용을 주석까지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전통 서당식 독송의 낭랑하고 오묘한 소리에 어느덧 나는 운율에 맞춰 코를 골고 말았다.

새벽녘 꿈결인 듯 아스라한 소리에 놀라 잠이 깨었는데, 노학자께서는 어느새 일어나 정좌를 하시고 또다시 경전을 암송하고 계셨다. 당대 최고의 도인을 만났으되, 나의 단전 아래는 여전히 뜨뜻하여 속세를 벗어날 기미가 전혀 없었다.

이튿날엔 천년 사찰 지리산 ‘실상사’와 ‘약수암’ 그리고 함양의 ‘일두 정여창 고택’과 ‘남계서원’을 답사하였다. 간찰학회 이사장이신 전임 문화재 청장의 유명세가 너무나 대단하여 가는 곳마다 사인과 기념 촬영을 원하는 인파가 몰렸고, 종택의 종손들이 직접 나와 환대하시며, 답례품을 넘치도록 일행에게 챙겨주셨다.

남계서원에서는 한·중·일 삼국의 서원에 대한 특성과 비교에 대한 품평이 이어졌다. 중국의 서원이 ‘장서 기능’과 ‘과거급제자의 출신지’에 대한 업적을 과시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면 조선의 서원은 ‘유학이 지향하는 이상세계를 구현할 선비를 양성하는 데 중점’을 둔 차이가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고 조선 서원의 실패를 ‘교육 기능’과 ‘제향 기능’을 동시에 갖춘 데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었다.

매년 국내외 답사를 수시로 하였는데, 코로나로 3년을 쉰 끝에 모처럼 함께 모여 ‘장수유식(藏修遊息)’의 선비문화를 체험하는 매우 유의미한 여행이었다. 답사 여행의 대가들이 모인 자리인지라 어디서도 보고 배울 수 없는 귀한 현장 체험 학습의 시간이었다.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