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 l 축소

이신칭의 - 以信稱義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주변의 교인들로부터 종종 자신의 기도가 응답 되었다고 ‘할렐루야’ 하면서, 마치 자신이 신접한 직통 신자인 듯 간증하는 사람들을 볼 때가 있다. 그때마다 드는 생각이 600만 유대인이 죽어갈 때, 그 처참한 울부짖음에도 침묵하시던 그분의 뜻을 당신은 감히 무어라 설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다. 당신의 영발이 그들보다 세서인가? 아니면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은사가 있어서인가?

동양 철학에 있어 공자가 주창한 ‘유학’의 원형을 가장 크게 훼손한 것은 ‘주자의 성리학’이다. 백호 윤휴가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이냐’ 하며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토로하였을 때 조선의 지성은 그를 사문난적으로 매도하며, 유가적 공분으로 삼아 그를 사회적으로 매장하였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야훼’는 보편적 인류 전체를 구원하는 ‘절대신’이 아니라 그들의 안위를 지키는 민족적 차원의 ‘수호신’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규례를 지킴으로써 구원을 얻을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문명의 진보와 함께 확장된 율법의 규례들은 부조리한 모순의 연장일 뿐이었다. 이 불완전한 약속을 예수는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서, 마침내 율법을 완성한 것이다.

예수는 사랑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인류의 구속사에 대한 방법을 예표하였지만, 이 진리를 가장 크게 왜곡시킨 것은 ‘바울의 기독론’이다. 바울은 자신이 속한 이스라엘 민족에서조차 자신의 교리가 외면당하였다. 이 때문에 이방 민족에게 포교사업을 진행한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에게 있어 이스라엘의 율법은 무겁고도 가혹한 짐이었다. 그는 이 율법의 무거운 짐을 폐하는 대신,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라는 교리를 전파하였다. 이 교리는 이방 민족에게 있어 매우 매력적이고 달콤한 논리였다. 믿기만 하면 천국이 보장된다는 이 미완의 복음을 대한민국 기독교는 마치 천국의 보증수표처럼 남발해댄 것이다.

바울은 또 “천하에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오직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차피 너나, 나나 세상엔 온통 죄인투성이인데, ‘오직 예수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는다’라는 신박한 논리를 계발하였다. 이 논리는 세상 윤리에 불감한 비양심적 인간들에게는 너무나 쌈박한 ‘보증보험’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전광훈이도,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도, 깡패 김태촌과 조양은이도, 서부청년단의 몸통이며 전태일의 장례를 끝내 외면했던 한경직이도, 자식에게 대물림으로 세습하고 아직도 살아서 천수를 누리는 김삼환이도 모두 다 오직 예수의 존재를 믿는 ‘지적 동의’ 한 가지 때문에,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그들이 들어가는 천국이라면, 나는 진정으로 그 싸구려 복음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싶다.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했지만 내 생각은 그와 다르다. 의인은 예수의 존재를 믿는 ‘지적 동의’나 ‘인식의 동의’에 대한 지각적 깨달음으로 얻어지는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神)’의 존재와 무소부재(無所不在)한 그의 성품을 믿는 믿음으로 인하여 수반되는 의로운 행위, 즉 예수가 말한 ‘사랑’에 대한 실천적 결과물로서 구원에 이르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소리 해대면 또 눈에 쌍심지 켜고 달려드는 의로운 조선의 신학자와 목사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마치 신이 자신만의 전유물 인양 착각하며, 자신이 믿고 있는 확고부동한 교리만이 신의 영역과 세계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한다고 호도하는 하루살이 인생들 말이다.

‘믿음’이란 질량의 세계가 아니다. 계량으로 수치화하고 가치를 절대화할 수 있는 물질의 영역이 아니란 말이다. 인간이 신의 세계를 증명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마치 소경이 코끼리를 만지는 식의 ‘군맹무상(群盲撫象)’하는 편견일 뿐이다. 나와 너의 믿음의 양태나 현상이 다를 뿐이지, 나와 다르면 모두가 틀렸다는 식으로 이단시하거나 사문난적쯤으로 단죄하려는 편협한 시각과 불균형의 아집을 버려야 한다.

오류와 허점투성이의 바울 신학에 경도되어 있는 교회주의 기독론이나 기복주의적 신학 역시 인류사회의 제도권에 검증된 진리가 아님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겨우 자기 집 뒷 마당의 흙이나 몇 줌 파보고서 마치 지구의 지질을 다 아는 듯 경조부박(輕佻浮薄)한 행동을 한다면 전광훈류의 싸구려 복음주의자 신세를 결코 면치 못할 것이다.

간혹 전광훈을 비판하며 차별화를 시도하고 싶어 하는 일부 목사들이 있지만, 그들 또한 조선의 개독 세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바울의 교리에 세뇌된 조선의 교회주의 기독교 목사들은 대체로 그놈이 그놈일 뿐이다. 교회는 더 이상 교인을 가두어두고 우려먹는 가두리 양식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유통과정에서부터 변질된 교회주의 기독교는 이제 그만 건너뛰고, 차라리 신과 직거래를 하는 것이 옳다.

요즘은 부활절 대목이라 제철 만난 상인처럼 분주할 것인데, 모쪼록 사업이 번창하길 바라며 모두가 성불하기를 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이전화면맨위로

확대 l 축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