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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시행락-及時行樂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급시(及時)’란 일을 행하기에 적당한 때 곧 시기적절함을 뜻하고, ‘행락(行樂)’이란 즐겁고 재미있게 지낸다는 뜻이다. 두 단어를 조합한 의미는 시기를 놓치지 않고 삶의 행복과 즐거움을 누린다는 뜻이다.

‘오늘을 즐겨라’라는 뜻의 라틴어 ‘카르페 디엠’과 같은 맥락이다.

스피드를 요구하는 정보화 시대에 우리는 ‘급한 일’들이 너무나 많은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요한 일’은 자연 소홀하기 쉽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누구나 빨리 처리한다. 또한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에는 무관심해도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중요하지만 급해 보이지 않는 일’에 무관심한 것이다.

중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어제의 태양으로 오늘의 옷을 말릴 수 없고, 오늘의 달빛으로 어젯밤 그림자를 비출 수 없다” [昨天的太阳晒不干今天的衣裳, 今晚的月光照不亮昨晚的身影]

이 말을 더욱 유려한 문장으로 다듬어낸 유시민 작가의 비유가 찰지다. “어제의 비로 오늘의 옷을 적시지 말고, 내일의 비를 위해 오늘의 우산을 펴지 마라”

한 번뿐인 인생이다. 모든 순간이 첫 순간이고 마지막 순간이며, 유일한 순간이다. 나는 오늘 비로소 ‘중요하지만 급해 보이지 않는 일’을 위해 길을 나섰다.

‘학불선 산악회’의 4월 정·모는 ‘월롱산(月籠山)’ 등반이다.

‘월롱(月籠)’은 높은 곳을 뜻하는 우리말 ‘다락’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서, 이두식 표기법을 차용한 것이다. ‘월(月)’은 우리말 ‘다’나 ‘달’을 한자로 쓴 것이고, ‘롱(籠)’은 ‘락’이 ‘랑’이나 ‘롱’으로 변한 것이다. 실제로 월롱산은 ‘다랑산’이라고도 불린다. 월롱산 주변에 ‘다락 고개’, ‘달앗과’ 같은 지명이 있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월롱역에 도착하니 야속한 궂은비가 서럽게 내리기 시작했다. 일행은 뜻밖의 집결지에서 여장을 풀고 난상토론에 들어갔다. 산행을 강행할 것인가? 무리수에 목숨 걸지 말고 그냥 이곳에서 낮술에 청춘을 걸을 것인가? ‘급시(及時)’가 졸지에 ‘급시(急時)’가 되고 마침내는 ‘불시(不時)’가 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때 거짓말처럼 해님이 찾아오셔서 눈부신 세상의 화창함을 드러내었다. 궂은비야말로 우리의 급시에 합당한 ‘시우(時雨)’가 되었던 것이다.

1시간마다 다니는 월롱산 순회 버스 기사님은 이른 아침 내린 비로, ‘이런 날 누가 산행을 할 것인가?’ 싶은 생각에 조기 퇴근해버려서 버스가 운행이 중단됐단다. 일행은 대절 택시 네 대에 나눠타고 급시행락 하는 여유로움으로 산행에 올랐다. 천지 동산엔 아무도 없이 그저 우리 일행뿐이었다. 산적 대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안 올라왔으면 큰일 날 뻔했겠네” 우린 마치 에덴동산을 접수한 기분이었다. 산상수훈의 10분 스피츠를 담당해 주신 원주에서 오신 김유진 선생은 친환경 자연인이다.

그녀는 마장 마술에 내공이 깊은 애마부인(?)으로서, 올여름 몽골의 초원에서 ‘야승(野乘)’ 투어를 계획하고 있다. 또한, 내일 자녀의 혼례가 있음에도 공사를 다 망(?)하신 채, 참석하신 모 재단의 연구소 소장님, 그리고 대전에서 한걸음에 달려오신 제주도 전문 사진작가님, 한국 시니어 모델협회 회장이신 안수경 님 등 모두가 다 아름답고 고마운 친구분들이다.
무엇보다 가장 반갑고 고마운 친구분은 멀리 미국에서 찾아주신 정 선생님 부부이다.

그는 이른바 세칭 명문 경기고 출신으로서 조영래 변호사와 김근태 의장 김태동 교수 등과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유신 치하의 세상을 생생하게 증언하며 불온한 시대의 아픔을 서로 격하게 공감하였다. 별 볼 일 없는 모자란 페친의 글에 위안이 되어 한국행 나들이를 결행하셨다니 너무나 크게 감읍할 뿐이다. 이번 여행이 큰 기쁨과 행복을 누리는 시간이 되기를 빈다. 도반과 함께 삶의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눈을 통해 배우는 세상은 언제나 신선한 충격이다. 나의 무지와 편견의 비늘이 벗겨지는 감동의 시간이었다. 모두 다 ‘급시행락(及時行樂)’ 하시기를.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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