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피는 양지바른 선산에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가 있고, 비탈진 언덕 너머에 농사짓는 아버지의 전답이 있고, 느티나무 심겨있는 신작로에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아담하게 자리 잡은 그런 그림 같은 풍경이 담겨 있는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
굳이 농촌이 아닌 어촌이면 어떻고, 산촌인들 어떠하겠는가?
나는 도시 빈민으로 한세상을 떠돌다 보니 마땅히 정 줄 곳이 없어, 돌아갈 고향이 있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내 친구 아무개는 현직 대사인데 그에게는 네 가지 불멸의 기록이 있다. 첫째는 나고 자란 곳에서 평생을 살았다. 도시가 고향인 사람에게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다. 덕분에 그는 그 흔한 위장전입 한번 없이 박근혜 정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고위공직자 인사 검증에서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는 완벽한 청백리로 평가받고 있다. 둘째는 193개 유엔 가입국 대사 중에 영어 발음이 가장 안 좋은 대사로 정평이 나 있다. 셋째는 외교부 직원들 사이에서 가장 대사 같지 않은 대사 즉 권위의식이 가장 없는 대사 1위이다. 넷째는 외교부 후배들의 투표에서 가장 닮고 싶은 선배 대사 1위이다.
이 정도면 친구 자랑이 흉이 되지 않을 만하지 않은가? 오늘 수십 년 만에 친구의 고택을 방문하였다. 70년대 학창시절엔 이곳이 신흥 문화주택이었는데, 지금은 낡고 초라한 모습으로 변모하고 말았다. 재작년 춘부장께서 작고하시고 지금은 큰아들이 홀로 살고 있다.
그는 누추한 곳이라며, 한사코 초대를 거부했으나 내겐 그의 집이 어떤 고대광실보다 훌륭했다. 온전히 건재해준 것만으로도, 내게는 무한한 영광이요 기쁨이었다. 친구의 집마저 없었더라면 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은 그저 과장된 전설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근 50년 만에 둘러본 초등학교 교정엔 온통 그리움뿐이었다. 전교 회장이었던 친구가 매주 월요일 조회시간마다 구령대에 올라가서 ‘○○ 어린이 맹세’를 하던 기억도 새롭고, 학교 정문 앞에서 주번을 서던 기억과 문구점에서 군것질하던 기억도 어제 일처럼 새롭다.
탁사회(濯斯會) 맴버인 ‘모범귀족’, ‘수학천재’, ‘도시농부’와 함께하는 추억여행에 학불선(學佛僊) 대표 미인 3인방이 왕림하셨다. 지난 추억을 함께 겪은 어제의 용사들처럼 우린 너나 없이 폭풍 수다를 떨며 즐겁게 노래를 불렀다. 현실의 고뇌와 시름이 한방에 씻겨지는 힐링의 시간이었다. 살면서 이런 날이 있다는 것은 신이 내린 위로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