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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면 알게 된다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정조 때의 문인 저암(著菴) 유한준(兪漢雋)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의 발문에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그림은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 아끼는 사람, 보는 사람, 소장하는 사람이 있다.”
[畵有知之者, 有愛之者, 有看之者, 有畜之者.]
…中略…
“알게 되면 참으로 아끼게 되고, 아끼면 참으로 볼 수 있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소장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저 쌓아두는 것과는 다르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이 유려한 말씀을 유홍준 교수는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매우 세련되게 인용하였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무엇을 좋아하게 되면 그 대상의 가치를 알게 되고, 그 대상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되면 비로소 그 대상의 진면목이 보이게 된다. 그러므로 그때 보는 것은 이전에 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다.

이 멋진 말을 내가 다시 한역하였다.
‘애즉지 지즉견 차견자부이어전견 - 愛則知, 知則見, 此見者復異於前見.’
조금 더 줄여서 글자 수를 맞춰보니,
‘애즉지지즉견 차견이어전견 - 愛則知知則見, 此見異於前見.’
“You can figure it out when you love it, you can look it in when you figure it out, then it should not be the same as before you do.”
오묘한 말속에 참으로 심오한 매력이 있다.

‘서예’에는 신동이란 말이 없다. 소년 문장가는 있어도 소년 명필은 없다. 오랜 시간 익히면 그만큼 글씨는 숙련되기 마련이다. 이 말은 바꿔 말하면 재능보다는 공력이 우선한다는 말이다. 누구나 공력을 들이면 글씨의 격은 일정 수준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므로 붓글씨는 ‘숙(熟)’의 예술이다. 점과 선과 획에 의한 조형미는 글씨를 써본 사람만이 자형에 대한 심미안을 가질 수 있다. 먹의 ‘농담’과 ‘명암’, 선의 ‘완급’과 ‘강약’, 자형의 ‘비수’와 ‘허실’ 등등
기운생동 하는 문자향(文字香)의 예술적 조형미에 대한 감식안은 결코 공력이 없이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글씨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 감상의 안목도 한순간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조선 후기 학인들 사이에는 이른바 ‘삼망(三亡)’이라는 문단의 세평이 있었다. 즉 “서망추사(書亡秋史), 문망연암(文亡燕巖), 시망김립(詩亡金笠)”이라 하였다. 이 말은 곧 글씨는 추사가 망쳤고 문장은 연암이 망쳤으며, 시는 김삿갓이 망쳤다는 이야기다.

추사의 글씨는 자신만의 독특한 서체로 일가를 이루었으나 왕희지나 종요의 글씨처럼 학습자가 전범으로 삼아 배울 수 있는 글씨가 아니라는 것이며, 연암의 문장은 문체반정의 정책에 어긋나는 패사소품체의 글이라 하여, ‘문학은 도(道)를 실어나르는 도구’라고 생각했던 당시 주류 사조에 배척을 당했다.  또한, 김삿갓의 세속적인 풍류와 해학의 시는 시의 품위와 격조를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주류 문단에서 무시를 당하였다. 이는 예법과 격식을 중시하였던 성리학적 사고를 기반으로 하는 유교 사회에서 자유로운 사고와 독창적 발상이 얼마나 인정받기 어려운가를 반증하는 사례들이다.

굳이 붓으로 표현하는 문자 예술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아는 법’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인생도, 사랑도, 학문도, 예술도, 세상도 모두가 자기 수준에 아는 만큼 보이고 자기 기준에 보이는 만큼 알 뿐이다. 예정에 없던 뜻밖의 일로 이사를 하다 보니 서재 책장 귀퉁이에서 족자가 하나 나왔다. 오래전에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못난 것 하나를 남겨 두었던 모양이다. 이런 글을 쓰고 놀았다니 그저 부끄러울 따름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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