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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나의 주관적인 견해이다. 나는 근대 한국불교에 있어 오도송(悟道頌)의 최고봉을 꼽으라 한다면 마땅히 경허 선사의 게송이 선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근대 한국의 불교, 한국의 선문화(禪文化)에 그만큼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드문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의 깨달음만큼 나를 대오각성시킨 게송을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가 동학사에서 목숨을 건 용맹정진을 할 때의 일화이다. 시주 곡식을 가져온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가 말하기를, “중은 시주 밥만 축낸 관계로 죽으면 소가 된다.”라고 하자, 다른 이가 “그러나 소가 되어도 콧구멍이 없는 소만 되면 되지.” 하였다. 그때 이 말을 들은 제자 원규(元奎)가 경허 스님에게 전하기를, “시주의 은혜만 지고 죽어서 소로 태어나되 콧구멍 없는 소만 되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경허 스님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아래와 같은 불세출의 오도송(悟道頌)을 남겼다.
“홀연히 콧구멍이 없다는 소리를 듣고
돌연 우주가 나의 집임을 깨달았도다.
유월에 연암산에서 내려오는데
야인이 일 없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忽聞人語無鼻孔 - 홀문인어무비공
頓覺三千是我家 - 돈각삼천시아가
六月燕巖山下路 - 유월연암산하로
野人無事太平歌 - 야인무사태평가
‘삼천(三千)’은 온 세계를 말하는 ‘삼천대천세계’를 줄여서 표현한 것이고, ‘유월(六月)’은 경허 스님이 돈각한 시기를 의미하며, ‘연암산(鷰巖山)’은 천장암(天藏庵)이 있는 충남 서산에 있는 산의 이름이다. ‘산하로(山下路)’는 천장암에서 바라본 세상을 말하며, ‘야인(野人)’은 농부를 뜻한다. 농부가 밭을 갈고 김을 매듯 수행자도 마음의 밭을 갈아야 함을 비유하고 있다. 마지막 장의 “야인이 무사(無事) 태평가를 부른다.”라는 표현은 천고의 절창이다. 심조만유(心造萬有)의 대각성이요, 한국 선풍의 위대한 부활의 노래이다. 이 게송의 주체는 ‘무비공(無鼻孔)’이다. 소가 콧구멍이 없다는 것은 고삐에 묶여 있지 않다는 뜻이다. 경허는 스스로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대 자유의 경지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의 법명인 ‘성우(惺牛)’라는 뜻과 같이 잠자고 있던 마음의 ‘소(牛)’가 비로소 ‘깨어난(惺)’ 것이다.
춘추시대 노(魯)나라의 현자 유하혜(柳下惠)가 행했던 ‘좌회불란(坐懷不亂)’의 고사에 견줄만한 일화이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기이한 행적이, 때로 일반인들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파격의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언젠가 한 승려가 경허에게 진리를 깨치고 환속한 이후에 왜 술을 끊지 못하는지를 물은 적이 있다. 그는 이때 아무리 마음이 부처임을 깨쳤다 하더라도 중생으로 살았던 습기가 남아있어서 이를 제거하기 위한 시간과 수행이 필요하다고 말하였다. 아래의 내용은 경허가 솔직한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면서 인용한 보조국사 지눌의 「수심결(修心訣)」이다.
“문득 깨치면 부처와 다름없지만,
여러 생에 걸친 습기는 살아 있네.
바람은 잠잠하나 파도는 오히려 솟구치고
이치는 분명하나 망념은 엄습하네.”
頓悟雖同佛 - 돈오수동불
多生習氣生 - 다생습생기
風靜波尙湧 - 풍정파상용
理顯念猶侵 - 이현염유침
인간의 실존을 이처럼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또 있을까? 아무리 깨우쳤다 한들 ‘해탈한 부처’와 현실적 ‘인간의 삶’ 사이에는 일정한 간격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중생이 부처라는 실상을 완벽히 깨우쳤다 하더라도 일상에서 열반한 부처의 모습으로 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는 오랫동안 중생으로 살아오면서 익힌 습기를 단번에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중생(重生)’을 체험했다거나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목사나 교인들을 대할 때가 있다. 술 담배 끊었다고 거룩해진 것이 아니듯 신학을 전공했다고 모두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성서에는 ‘선 줄로 생각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하였다. 인간의 지혜로 신을 측량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인간의 삶은 살아생전에 완성이 되는 완전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완성을 지향하는 미완의 불완전체일 뿐이다. 완성된 건축물이 아니라 평생을 공사만 하다 끝나는 '공사 중'인 인생인 것이다. 자신만이 진리를 알고 있는 양, 성경 자폐에 빠진 치료 불가능한 중증의 환자를 볼 때마다 참담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능엄경(楞嚴經)」에는 ‘이즉돈오 사비돈제 - 理卽頓悟 事非頓除’라 하였다. “이치로는 돈오(頓悟) 했을지라도 현실에서는 곧바로 (습성이) 제거되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한 번의 중생 체험이나 단순한 믿음만으로 결코,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다. 깨친 이후에도 지속적인 수양이 필요한 것처럼, 죽는 날까지 스스로 자기를 부인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한계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