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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 이야기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벌’에 관한 이야기라 하여 꿀을 만드는 벌을 이야기하고자 함이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세력을 형성하여 군림하고 있는 ‘벌(閥)’들을 이야기하고자 함이다. 이른바 재벌, 학벌, 군벌, 문벌, 파벌, 가벌, 세벌, 또는 벌족, 벌열 등등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당·송(唐·宋) 이후에 작위(爵位)가 있는 집의 대문에는 특별한 기둥을 세웠는데, 왼쪽의 것을 ‘벌(閥)’, 오른쪽의 것을 ‘열(閱)’이라 하였다.

‘벌’은 그 집안의 공적(功績)을 의미하고 ‘열’은 그 집안의 작위의 경력(經歷)을 의미하는데, 일종의 국가유공자 표식인 셈이다.

두 기둥의 거리는 10척(尺)이다. 기둥머리에는 기와 통을 얹었는데 이를 ‘오두벌열(烏頭閥閱)’이라 하였다.

[閥, 積功也. 閱, 經歷也.] 『漢書』·「車千秋傳」
[閥閱二柱, 相去一丈. 柱端置瓦筒, 號爲烏頭.] 『冊府元龜』
이로부터 공훈(功勳)이나 공적(功績)이 있는 집안을 지칭하여 ‘벌열(閥閱)’이라 하였는데, 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의 경력이 많은 집안이라는 ‘문벌(門閥)’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영어식 표현으로는 ‘distinguished family’쯤 되겠다.

대대로 내려온 그 집안의 지체인 ‘문벌’을 다른 말로는 ‘가벌(家閥)’, ‘문지(門地)’, ‘세벌(世閥)’ 등으로 불렸는데, 특별히 신분이 높은 가문(家門)의 일족(一族)을 ‘벌족(閥族)’이라 하였다. 이때의 ‘벌열(閥閱)’이란 매우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영예로서 국가로부터 공인된 훈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옛날의 ‘벌열’은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에 희생하여 국가와 민족에 공을 세워서 받은 영예의 상징이었던 반면, 지금의 ‘벌열’은 국가와 국민을 겁박하여 한몫을 챙기려는 권력자들의 수탈을 상징하는 완장이 되고 말았다. 반칙과 특권으로 자신의 이권만을 추구하며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못 참는 저급한 근성을 가진 권력 집단이 현대의 ‘벌열’이다.

현대 사회의 ‘벌열’의 무리는 다양한 세력의 형태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재계(財界)에서 큰 세력을 가진 자본가나 대규모의 기업 집단을 이룬 부호들이 ‘재벌(財閥)’이요, 군부(軍部)를 중심으로 정치 세력화한 집단이 ‘군벌(軍閥)’이요, 학문을 닦은 정도를 가늠하는 출신 학교의 사회적 지위나 등급이 ‘학벌(學閥)’이요, 권력을 독점하려는 욕망으로 세력화한 정치집단이 ‘권벌(權閥)’이며,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따로따로 갈라진 사람들의 집단이 ‘파벌(派閥)’이다.

이에 더하여 최근에 용산을 중심으로 한 신흥 벌족이 탄생하였다. 이른바 검사(檢事)들로 구성된 ‘검벌(劍閥)’이 그것이다. 이들은 ‘수사’와 ‘기소’라는 양날의 검을 가진 칼잡이들로서 국가가 부여한 합법적 깡패들이다. ‘수사권 가지고 장난치면 그게 깡패지 검사냐’라고 스스로 말하지만 실제로는 ‘기소로 명예를 얻고 불기소로 돈을 버는 족속들’이다. 이들의 권력 동맹은 건국 이래 가장 막강한 엘리트 파워 군단을 형성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이 벌족들의 이너서클에 의한 견고한 카르텔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벌열’이 부끄러운 시대가 됐다. 자랑스러워야 할 그들의 공적이 어떤 방법과 무슨 수단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속적 욕망에 눈이 먼 정치권의 ‘권벌’과 ‘검벌’들의 부끄러운 민낯들이 매스컴을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민주화를 이루어 가는 동안 재벌들의 잇따른 구속과 사면을 통해 비약적인 경제성장과 극소수에게 편중된 부의 축적이 어떤 이권과 결탁하여 어떤 방법에 의해 이루어졌는지 만천하에 탄로가 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제 ‘벌(閥)’이 더 이상 존경과 영예의 상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반칙과 특권의 상징이 되어 타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말았을 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에게 매우 슬픈 시대사적 진실은 타락하지 않은 집단도 타락하지 않은 인간도 없는 이 불온한 시대에 촛불 또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매우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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