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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 서부영화를 보며 자랐다. 주말이면 어김없이 나오던 흑백 TV 속의 서부 개척사 시대의 활극은 나의 놀이터요 꿈동산이었다.
고전적 서부영화의 대표적 주자이며, 간판 얼굴은 단연 존 웨인이다. 그가 보안관으로 나와 악당들과 결투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어린 시절 그는 나의 우상이요 로망이었다. 그가 열연하였던 <역마차>와 케리 쿠퍼의 <하이눈-High Noon>, 알란 랏드의 <셰인-Shane>, 버드 랭카스터와 커크 더글러스 주연의 <OK 목장의 결투>,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등 당대 최고의 배우들이 열연한 <황야의 7인> 등은 선악 구도가 뚜렷했던 미국식 정통 서부극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선악의 대결이 분명했던 고전적 서부영화의 법칙을 파괴하고 새로운 방식의 서부영화가 탄생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탈리아식 ‘마카로니 웨스턴’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이 아니라 선악의 구별 없이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정글의 법칙을 통해 인간의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 마카로니 웨스턴의 진수는 크린트 이스트우드의 <황야의 무법자>를 비롯해 프랑코 네로의 <돌아온 장고>, 테렌스 힐의 <내 이름은 튜니티> 등이 있다. 검은 싱글 정장의 매부리코, 독수리와 같은 비정한 눈빛, 빠른 속사포 같은 사격 솜씨로 여러 명의 상대를 단숨에 제압하고도 뭔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 자리를 유유히 떠나던 매력적인 악당 ‘리반 클립’조차도 내게는 멋진 우상이었다. 드넓은 황야에 허무한 먼지 바람을 날리며 숨 가쁘게 달리는 말발굽 소리~,
마치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것같이 은은히 울려 퍼지던 종소리~,
비수와 같이 날카롭게 가슴을 파고들던 기타의 공명음~,
먼지를 날리며 말을 타고 사라지는 총잡이의 등 뒤로 물결처럼 출렁이던 방랑의 휘파람 소리~,
내가 미국을 존경하는 이유는 오직 하나이다. 국민에게 총기 소지를 허가하고, 규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인종 사회에서 총은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인간은 총 앞에서 만민이 평등하다.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무시하지 못하고,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총이 있을 때만이 가능하다. 서로에게 목숨을 건 한방이 있기 때문이다. 오직 총만이 자신을 방어하고 인격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자의 편익일 뿐이다.”라고 했다. 법이 만능화가 된 현대사회에도 법은 여전히 강자와 권력자의 편익일 뿐 결코, 약자를 지켜주지 못한다.
최근 연이어 봉변을 당하고 나서 자존감이 바닥을 뚫고 지옥의 문턱을 오갈 때 마침 고마운 친구의 소개로 말을 타게 됐다. 리듬감이나 운동 신경이 전무하여 만년 고문관이던 내가 이런 질주 본능이 있을 줄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내게 기마민족의 피가 흐른 탓이었을까? 아님 존 웨인의 영향력 때문이었을까? 어쨌거나 나는 말을 타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쾌감을 맛보았다. 자연과 함께하는 가장 원시적인 방법 속에 가장 원초적 희열이 숨겨져 있었다. 극심했던 우울증이 단박에 해소되었다. 다 죽어 가던 우울증 환자가 몽고의 초원을 달릴 것을 생각하고, 애리조나 황야를 달릴 것을 꿈꾸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말을 타고 강물을 건너는 기분은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짜릿한 전율이다. 도로를 달리던 말발굽 소리는 나의 심장을 자맥질하던 태초의 신비이며, 일찍이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환상의 소리였다. 아~, 이제부턴 ‘말’을 타고 강물을 건너보지 않은 인생하고는 ‘말’을 섞지 말아야겠다. 수년 전 애리조나에서 미국 서부 개척사 박물관 입구의 비문에 이런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겁쟁이들은 결코 시작조차 하지 못하였고, 의지가 약한 자들은 중도에서 죽었으며, 오직 결심이 굳은 사람만이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니, 그들은 개척자들이었다.”
The cowards never started, The weaks died on the way, Only the strong arrived, They Were The Pioneers.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