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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대한 단상(斷想)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이 있다. 이때 ‘경마’는 과연 무슨 뜻일까? 조선 시대에도 정말 ‘경마장’이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경마(競馬)’라는 말은 잘못된 발음이 관습화되어 굳어진 표현이다. 본래는 경마가 아닌 ‘견마(牽馬)’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이 말의 의미는 ‘말을 타면 노비(奴婢)를 거느리고 싶다.’라는 뜻으로 ‘기마욕솔노-騎馬欲率奴’에서 나온 말이다.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흔히 ‘경마’라고 일컫는 말의 어원은 ‘견마’의 발음을 오용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견마(牽馬)’는 말을 끄는 ‘고삐’를 뜻하며, ‘잡히다’는 ‘잡다’의 사동사이므로 ‘잡게 하다’라는 뜻이다. 또한 ‘견마배(牽馬陪)’란 남이 탄 말을 끌고 가기 위해 고삐를 잡는 ‘견마잡이’ 곧 말몰이꾼을 의미하는 말로서 요즘으로 치자면 관용차 기사에 해당한다.

조선 시대에 ‘사복시(司僕寺)’라는 관청이 있었다. 사복시는 궁중의 말과 가마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곳으로 지금의 교보빌딩 뒤쪽에 자리하였다. 이 사복시에서 말을 돌보던 종7품의 하위 관리를 ‘견마배(牽馬陪)’, 또는 ‘거달(巨達)’이라고 불렀다.

TV 사극이나 영화에서 종종 보듯, 이 ‘견마잡이’들이 상전이 길을 나설 때면 말고삐를 잡고서 “쉬~, 물렀거라! 아무개 대감 행차시다.”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행인들의 군기를 잡았다.

상전의 위세를 배경으로 자신의 주제를 망각한 채, 호가호위하는 이 ‘거달’들의 우쭐거리는 허세를 보고 ‘거들먹거린다.’는 말이 생겨났다. ‘거달(巨達)’이 목에 힘을 주듯이 ‘거달목거린다’라고 하던 것이 오늘날 ‘거들먹거린다’라는 표현으로 바뀐 것이다. 모시는 상전의 위세를 이용해 각종 이권의 개입에 관여한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이 ‘견마잡이’나 ‘거달’들의 횡포가 심하고 빈번해지자 저잣거리의 하인들은 점차 큰길을 피해 골목길로 다니게 되었다. 종로의 뒷골목 이름이 ‘피맛골’로 불리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로, 지체 높은 사람들의 마차를 피한다는 의미의 ‘피마(避馬)’에서 생겨난 명칭이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고위 관직의 당상관들은 두 명의 견마잡이를 둘 수 있었다 한다. 말 좌우에 한 사람씩 세워두고서 위세를 부리며 권위를 세우겠다는 지나친 허세가 아닐 수 없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견마의 사치가 더욱 심해져서 ‘과하마도 견마 잡힌다.’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요즘 말로 하면 ‘경차를 타면서 기사를 둔다’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과하마(果下馬)’란 조랑말을 의미하는데, 말의 키가 너무 작아서 말을 타고서도 과일나무 밑을 그냥 지날 수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 살림이나 재산이 파산 상태에 이를 때 우리가 흔히 ‘거덜이 났다.’라는 표현을 쓰는데, 이 말은 양반댁 견마잡이가 그 집의 살림살이를 기울게 할 정도로 견마 치장에 돈을 낭비했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중국 촉나라의 유비가 자신의 세력을 잃고 형주(荊州)의 자사 유표(劉表)에게 의지하여 은거하고 있던 시절에 오랫동안 말을 타지 못하여 넓적다리에 살이 찌는 것을 한탄하였다는 고사에서 나온 말로 ‘비육지탄(髀肉之嘆)’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여 헛되이 세월만 보냈음을 탄식했다는 고사이다.

유비가 비육의 탄식을 했을 나이에 나는 비로소 말 타는 법을 배웠다. 그런데 교관이 내게 승마에 천부적 재능이 있단다.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 젬병이어서 심지어 군대에서 총검술조차도 뺑뺑이를 돌며 나머지 공부를 했던 슬픈 몸뎅이를 가진 내가 이 나이에 육체를 쓰는 일에 재능 발견이라니.

그저 나는 나의 친절한 죽음을 위한 버킷리스트 중 하나로서 극복하고자 했던 것일 뿐이었는데, 립서비스겠거니 하면서도 참으로 곤혹스러운 반전이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나는 조정의 관보를 전하는 기별군사(奇別軍士)나 했으면 재능에 맞았으려나?

망치를 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못으로 보인다더니 요즘 나는 앉으나 서나 말발굽의 환청 속에 산다. 한 달쯤이라도 깊은 산속에서 원시 수렵 생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굴뚝 같다. 인적과 소음 없는 숲속에서 새소리를 들으며 말을 달리고, 깊은 강가에서 낚시질이나 하는 그런 원시 수렵 생활이 내 생에 최고의 낙원체험일 거란 생각이다.

잘 사는 것(well being)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well dying)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삶’만큼 ‘죽음’도 존중되어야 한다. 마침내 대한민국이 전인미답의 초고령화 사회를 목전에 두고 있다 한다. 미국의 어느 인구학자는 지구상의 인류 가운데 인구감소로 소멸되어질 국가 1호가 대한민국이라 한다.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백세시대에 장수가 반드시 복이기만 할까 하는 의문을 지울 수가 없다. 생명에 대한 맹목적 집착이 만들어 낸 무의미한 연명치료에 대해 나는 깊은 회의가 든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방황하는 개인들의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 존재하고, 나는 홀로 소멸한다.”라고 하였다. 나는 지금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을 위한 친절한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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