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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장점은 조어력과 축약력이 탁월해 어휘력과 독해력이 풍성해지고 문해력이 향상된다는 데 있다. 그러나 종종 일부 인사들의 잘못된 표현을 관행적으로 무분별하게 좇다 보니 때로 전 국민이 문맹화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안전불감증‘이다. ‘불감증(不感症)’의 사전적 의미는 감각이 둔하거나 익숙해져서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실 ‘안전불감증’이란 말은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 비문이다. 어떤 고약한 인생이 처음 이 말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우환의식(憂患意識)을 갖는다’ 라고 할 때의 ‘우환(憂患)’은 사고나 위험 등의 재난에 대한 근심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할 때의 ‘유비(有備)’ 역시 전쟁이나 재난 등의 사고에 대한 대비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심히 쓰고 있는 ‘안전불감증’이란 말은 사고에 대한 인식이 둔하거나안전에 익숙해져서 ‘사고의 위험’에 대해 별다른 느낌을 갖지 못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므로, ‘사고 불감증’ 또는 ‘위험 불감증’이라고 해야 이치에 맞는 표현이다. “요즘 세대는 전쟁의 위험에 둔감하여 ‘전쟁 불감증’에 걸려있다.”라고 해야지 “‘평화 불감증’에 걸려있다.”라고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은가?
며칠 전 엘리베이터 안에서 어떤 병원의 홍보물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전단의 내용 중에 ‘피로 회복’ 에 최고라는 표현이 있었다. 순간 한문 전공자의 교정 본능이 발동하여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제했다.
‘회복(回復)’이란 이전의 상태로 돌이키거나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피로를 회복한다는 말은 ‘피로(疲勞)’한 사람이 다시 피로한 상태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피로는 회복할 일이 아니라 '해소(解消)’해야 할 일이며, 회복해야 할 대상은 피로가 아닌 ‘원기(元氣)’이다. 그러므로 ‘피로 해소’ 또는 ‘원기 회복’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이제는 아예 표준어로 굳어져 버린 ‘복개공사(覆蓋工事)’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복개’의 ‘복(覆)’은 ‘뒤집히다’라는 의미이다. ‘복분자(覆盆子)’나 ‘복거지계(覆車之戒)’ 또는 ‘복수불반분(覆水不返盆)’이라 할 때의 ‘엎다’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 쓰는 말이다. ‘덮다’라고 할 때는 발음을 ‘부’로 읽어야 한다. ‘하늘처럼 덮어주고 이슬처럼 윤택하게 길러 준다.’라고 할 때의 발음은 '복로(覆露)'가 아닌 ‘부로(覆露)’이고, 허균(許筠)의 작품인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라는 책 이름 가운데 ‘부부(覆瓿)’는 장독 덮개라는 말이다. ‘단지 덮개로나 쓰일, 변변치 못한 글’이라는 겸사의 표현인 것이다.
그러므로 복개공사는 ‘부개공사’라고 해야 옳은 말이고, ‘복면가왕(覆面歌王)’은 ‘부면가왕(覆面歌王)’이라고 해야 옳은 표현이다. 신문이나 방송에서도 이러한 엉터리 비문은 넘쳐난다. 얼마 전에는 한 기자가 “잘 알려진 ‘일화(逸話)’ 가운데~,”라고 하는 표현을 보고 기겁을 한 적이 있다. ‘일화(逸話)’라는 말 자체가 숨겨진 이야기, 곧 비하인드 스토리란 말로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뜻하고 있는데, ‘잘 알려진 일화’라니 완전한 형용모순이 아닌가?
언어라는 것이 ‘세(勢)’를 따른다는 대명제가 있어서, 많은 사람이 틀린 말을 오래도록 사용하여 관습이 되면 그것이 다시 표준어가 되고 마는 속성이 있으니 어쩌겠는가? 쓸데없는 전공자의 교정 본능은 기우에 불과할 뿐이니, ‘꼰대’라는 소리나 듣기에 딱 맞을 것이다. 한자를 배우지 않는 폐단으로 생겨난 것들이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이름은 고사하고 지명의 내력이나 단어의 어원을 모르는 것들이 수두룩하여 ‘온고지신(溫故知新)’을 이루기는커녕, ‘망고무신(忘故無新)’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한자를 알아야 한다고 암만 말을 한들 무엇 하겠는가? 내 입만 아플 뿐이로다. 그저 ‘말(言)’없이 ‘말(馬)’이나 타며, 흥이 나면 ‘말(馬)’하고 ‘말(言)’이나 하면서 ‘말(馬)’놀이나 할밖에.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