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빵부스러기 한 줌만 있어도 이 아이는 결코 굶어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한 줌의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림에 시달리다 세상에 절망하며 이 어린 생명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 아이에게 세상은 지옥이었으며, 삶은 저주였다.
그런데 이 어린아이가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죽으면 또 다시 지옥에 가야 한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기독교의 교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악행과 온갖 부정을 다 저지르고도 예수를 믿는다는 ‘지적인 동의’ 하나만으로 천국이 보장된다면 그런 교리는 ‘음주 운전자에게 보험을 들어놨으니 마음 놓고 술 퍼마셔도 괜찮다’라는 말과 같은 이치일 뿐이다.
노자는 “천도무친 상여선인 - 天道無親 常與善人”이라 하였다. ‘하늘의 도리는 특정인을 편애하지 않는다. 항상 착한 사람과 함께 할 뿐이다’라는 것이 노자의 주장이다. 바울이 노자의 도덕경을 한 번만이라도 읽었더라면, 혹은 사마천의 「보임소경서(報任少卿書)」를 한 번만이라도 읽었더라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구원’이니 ‘메시아 재림’이니 하는 황당한 주장으로 세상을 혹세무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많은 한국의 교인이나 목사들은 ‘전광훈’류를 비판하면서 자신과의 종교적 차별성과 도덕성을 부각하려 한다. 그러나 바울이 만든 기독교적 교리를 철저히 신봉하는 교조주의자라면, 그들 역시 독단의 도그마에 빠진 극단적 근본주의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유대인이나 기독인이 주장하는 야훼는 편애하는 ‘민족신’이요, 자신들의 탐욕을 채워주는 ‘수호신’에 불과하다. 그들은 야훼를 보편적 인류 전체를 사랑하는 초월적 신이 아니라 오직 자신들만을 위하고 자신들만이 부릴 수 있는 알라딘의 요술 램프쯤으로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가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듯 하느님은 유대인과 기독인만의 神이 아니다. 하느님은 결코, 목사와 교인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창조주’ 신이 있다면 보편적 인류 모두를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며, ‘심판주’ 신이 있다면 ‘믿음’이라는 사행성 보험이 아닌 자신의 ‘삶에 대한 구체적 결과물’로서 심판받는 것이 마땅하다.
‘예수’를 사후의 방편과 현세의 편익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치명적 오류는 예수가 말한 ‘독사의 새끼’와 ‘사랑해야 할 원수’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사랑해야 할 원수는 교회 밖에 있지만, 독사의 새끼들은 교회 내에 서식한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만 한다. 교회를 다닌다거나 예수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았다는 허황된 확신을 스스로 자신에게 세뇌하는 자들은, 죽는 날까지 날마다 자신이 독사의 새끼가 아님을 세상에 증명해 내야 한다. 저희끼리는 신앙공동체라 자처하지만, 대다수는 종교동호인의 세속적 이권연대이거나 종교를 매개로 한 권력 지향의 이권 카르텔에 불과하다.
아무런 삶의 변화조차 없이 예수를 믿었다는 ‘보험 영수증’ 하나 달랑 갖고서 사후의 보장성 보험이 적용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는 로또가 당첨되기를 바라는 환상에 불과하다. 교회에서 발행하는 사행성 보험에 의한 구원의 확신보다는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울려 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이 자신의 삶에 훨씬 더 유익하다. 뿐만이 아니라 ‘심판주’ 신에게 자신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게 됨으로써 오히려 정상참작될 여지가 훨씬 더 농후하다.
‘절대 긍정’, ‘절대 믿음’이라는 불치병에 걸린 맹신자들은 세상과의 소통을 한사코 거부한다.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을 우선시하며 자신이야말로 직통 신자임을 자처한다. 종교와 과학의 싸움은 이미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에서 끝났다. 아직도 여전히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거나 남자는 갈빗대가 하나 더 적다고 하는 신화를 진리로 믿는 자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이치를 외면하는 면벽(面壁)한 인생들이다.
깨달음의 길에는 반드시 하나의 길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믿는 믿음은 주관의 세계일 뿐이다. 언제나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적어도 자신의 신앙에 확신이 있다면 내가 믿는 신앙과 타인이 믿는 신앙의 차이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추어야 한다. 더 나아가 상대방이 갖는 신앙의 관점을 ‘자신이 정해놓은 종교의 교리’란 틀에 가두지 말아야 한다. 하느님은 인간이 만든 교리에 구속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는 인류의 안녕을 위해 바울의 오류와 폐단을 바로잡을 초인이 나와야 할 때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머지않아 반드시 역사 속에 소멸이 되고 말 것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