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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수 역시 빠르게 가라앉고 있다. 올해 4월의 소매판매가 3월보다 2.3%가 줄어들었다. 이 수치는 2020년 봄 코로나 팬데믹 때 지급했던 전 국민 재난지원금 효과가 소멸하며 6% 감소했던 2020년 7월 이래 최대 감소다. 4월 제조업의 재고가 외환위기 때를 추월한 배경이다. 통계청에서 1985년부터 집계하고 있는 제조업 재고 비율 지수(2020년=100)는 외환위기로 경제가 붕괴하였던 1998년 3월의 128.2가 지금까지 가장 높은 재고율 수치였다.
그런데 4월에 130.4로 이를 넘어선 것이다. 수출과 내수 모두 위축되는 상황에서 자연스러운 결과다. 5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월과 차이를 보인 점은 (21년 8월부터 기준금리 3% 포인트 인상에도) 지난해 6월부터 10개월간 2%대에서 꿈쩍 않던 서비스 물가 기여분이 2% 포인트 밑으로 처음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는 사실상 경기가 침체 국면으로 진입하였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1분기 가계의 실질 처분가능소득이 1년 전에 비해 하위 10%부터 상위 10%까지 전 계층에서 하락하였다. 특히 평균 소득이 114만 원도 채 되지 않는 하위 30% 가계의 소득이 3% 하락, 30~70%의 중간층 가계 소득이 2% 하락, 상위 30% 가계 소득이 0.5% 하락으로 소득이 낮을수록 타격이 크다. 소득이 낮을수록(소득 대비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인) 소비성향이 높다는 점에서 소매판매 급감 역시 자연스러운 결과다.
가계 소득과 더불어 기업의 매출액과 이익, 그리고 정부 수입 모두 감소하고 있다. 지난 1년은 처음으로 성장률에서 일본에 뒤처진 해가 되었다. 1년 전에 비해 일본보다는 0.4% 포인트, OECD 평균보다는 0.6% 포인트나 뒤처지고 있다. 그런데 이 격차는 향후 더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민간 경기가 좋지 않다 보니 정부의 세수 역시 축소될 수밖에 없다. 정부의 1분기 수입이 지난해에 비해 25조 원이나 감소하였다. 정부 출자기관의 순이익이 1년 전에 비해 약 3조 원이나 감소하면서 정부에 대한 배당금 역시 1조 2천억 원 이상 줄어들었다. 이때를 이용해 (그동안의 공공기관 민영화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복지의 시장화 및 산업화’를 꺼내 들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대다수 국민에게 귀결될 것이다. 이처럼 2분기 들어 한국경제호가 빠르게 가라앉고 있다.
고물가에 소득 감소는 한국 경제가 사실상 스태그플레이션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선장의 교체가 없는 한국경제호의 침몰은 시간문제이고, 최악의 경우 (또다시 외환위기 때처럼) 특권층 등 힘과 돈이 있는 사람은 구명정을 타고 침몰하는 배에서 탈출하고, 힘없는 대다수 국민만 피해당하는 일이 재현될 수 있다. 국민의 피해를 막기 위해 문제가 되는 선장을 교체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교체하지 않으면 선택 지점은 하나밖에 없다. 구명정을 놓고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풍경을 예상하면 된다.
이처럼 지난 1년간 우리는 야만 사회를 막지 못할 때 그 사회가 아귀다툼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변해 갈 수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문제는 침몰하는 배에서 구명정으로 옮겨 타려고 서로 싸워봤자 구명정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기대하기 어려운 구명정 탑승보다 배가 가라앉지 않게 해야만 한다. 이를 가로막는 것이 ‘정치 혐오증’이다. ‘특수통 패거리’가 툭 던져주고, 부패 언론은 대부분 사실이 아닌 기사를 연일 쏟아내고 이 분위기를 활용하여 ‘특수통 패거리’는 영장치고 소환해서 포토라인에 세우고 기소한다.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은 사람들의 관심을 죽이기 때문이다. 대중에게는 ‘특수통 패거리’와 부패 언론의 콜라보 연기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많은 국민은 정치 불신감으로 의식화(?)된 존재가 되어 버린다. 또한, 혐오 바이러스가 불신과 냉소주의로 발전할 때 양아치들의 폭력 또한 점점 대담해진다. 노동자들의 부정적인 모습을 침소봉대하거나 사실을 왜곡하여 분노의 대상이 필요한 대중에게 먹잇감으로 던져준다. 이 과정에서 부패 언론은 노동자를 엄청난 기득권(?)을 가진 사회악으로 포장한다. 이들이 대중에게 원하는 것은 그 먹잇감이 언제든 자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면서 ‘의미 없는’ 감정 배설에 동참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거악에 대한 분노는 외면한 채 ‘노동(자) 죽이기’에 동참하는 많은 사람은 칼로 자기 눈을 찌르는 것임을 모른다. 대중의 일부는 알면서도 체념의 분노놀이에 동참한다. 역사는 보여준다.
아귀다툼만이 남은 지옥이라는 ‘슬픈 결말’을. 그래도 나는 분노를 기록한다. 양아치에게 무릎 꿇을 수는 없기에. 그리고 나는 믿는다. 숱한 희생을 치르며 전설들을 만든, 한국 민주주의 역동성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 희생을 바탕으로 역사는 진보하기 때문이다. 내가 더딘 역사의 진보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만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과 학생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끝>
/최배근 건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