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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심(變心)은 유죄, 변신(變身)은 무죄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변화(變化)’라는 말의 뜻은 사물의 형상이나 성질이 모두 바뀌는 것을 말한다. 변화의 ‘변(變)’이란 현상이 바뀌는 형태의 변형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쌀이 밥이 되는 외형의 변화이다. ‘그 사람 변했네’ 할 때의 ‘변심(變心)’과 ‘변덕(變德)’이 곧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화(化)’는 형태가 아닌 형질의 변화를 의미한다. 밥이 누룩이 되었다가 막걸리로 탈바꿈되어 본질 자체가 바뀌는 형질의 변이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요즘 ‘산적’에서 ‘마적’이 되었다가 마적에서 다시 ‘해적’으로의 변신을 꿈꾸고 있다. 변심과 변덕은 유죄일 수 있으나 꿈꾸는 자의 ‘변신(變身)’은 언제나 무죄이다.

내게 팔자가 좋은 후배가 하나 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와 의기투합하여 사업을 정리하고 아내 역시 20년 넘게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였다. 그리고는 둘이 크로아티아에 가서 요트를 한 대 샀다. 그 요트로 지중해와 대서양, 남미와 아프리카까지 세계를 유람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부부는 전 재산을 끌어모아 요트를 몇 대 장만하여 마침내 레저 사업을 시작하였다. 그의 아내는 과거 모 방송국에서 ‘요트원정대’를 제작하였던 유명 PD였다.

그 친구 덕분에 나는 비로소 해적에 입문할 길이 열렸다. 어린 시절 막연히 동경했던 마도로스의 꿈이 마침내 실현된 듯한 기분이다. 언제나 노는 일에는 진심인 내게 하늘도 감동하여 기막힌 날씨를 허락해 주셨다. 맑다가 흐렸다 간간이 가랑비가 내리는 비 오는 선상에서의 ‘우중 일배주(雨中一杯酒)’는 그야말로 신선의 경지였다. 막걸리가 아닌와인이면 또 어떠한가? 오늘만큼은 도연명도 소동파도 부럽지 않았다.

어느 곳인지 가늠조차 못 하는 무인도에 정박하여 모처럼 바다 수영을 하였다. 함께한 일행들이 모두 전직 운동권 출신인 관계로 고문 후유증으로 도가니 불량, 고막 불량, 디스크 불량 등 각종 신체 장비가 불량하여 입수가 불가한 상태인지라 제트스키를 비롯한 물놀이는 온전히 나 혼자의 몫이 되었다.

내가 깊은 바다로 잠수하여 거북이를 타고 상어들과 2시간 넘게 사투를 벌이고 돌아와 보니 이 모지리 386들은 그사이 만취가 되어 있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화염병 만드는 비법과 신나 잘 사는 방법 그리고 대공 분실에서 받은 각종 고문과 ‘빵’에서의 단식투쟁 등을 어제 일처럼 늘어놓고 있었다.

평생을 아웃사이더로 경계인으로 살아온 나는 그들이 옥중체험을 이야기할 때에 청바지 뒷주머니에 도끼 빗 꼽고 다니며 다방에서 DJ하던 옛이야기로 맞섰다. 나도 한때 훌륭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부채의식 같은 것이, 늘 내 머릿속을 지배하였다. 어린 시절 위인전을 너무 많이 읽었던 후유증 탓이다. 위인전 작가들이 잘 못 심어놓은 세상에 대한 환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훌륭한 인물이 되겠다거나 이름을 남겨야겠다는 생각은 결코, 하지 않는다. 이제 나는 안다. 마지막에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주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을 사는 것이란 것을 말이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소속이 없는 경계인의 삶이 내겐 익숙하다. 산적의 변신이 무죄이듯 386의 변신도 무죄이다. 겨울에 입던 옷을 여름에까지 입을 수야 없지 않은가? 세월 따라 인연 따라 그렇게 변해가며 기웃기웃 구경이나 하면서 한 세상 즐겁게 소풍이나 다니며 사는 것도 재미난 인생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다음 달엔 우리 산적 졸개님들과 함께 대마도 원정 프로그램이나 짜서 쓰시마에다 내 오염수나 방류하고 와야겠다. 우리 선장 후배님께 잘 좀 부탁해야겠다.

요즘 부인과 함께 뱃길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를 답사하며 ‘이순신 프로젝트’를 구상 중이라는데 그의 성공을 기원한다.

나도 내년쯤엔 기어이 요트 타고 지중해를 답사하여 노르웨이 해적들과 진검 승부를 한번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오늘에야 안 사실인데 9월 19일이 세계 해적의 날이란다. 뭐 이런 날도 다 있는가 싶다. 어째, 좀 낭만적이지 않은가. ‘Ahoy, matey!’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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