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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와 신화적 예수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상의 탈출’을 통해 인간의 진정환 존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일상적인 관습과 규범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을 통해 자기 자신을 깨닫고 존재의 진리와 의미를 탐구하라는 의미이다.

최근 나는 ‘카를 바르트’와 ‘볼트만’ 의 책들을 보면서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매우 깊은 의문의 질곡을 헤매었다. 과연 ‘역사적 예수’는 오늘날 나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또한, 그의 죽음과 부활은 인류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볼트만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교회의 ‘캐리그마(kerygma)’에 대한 신앙이며, 예수는 캐리그마 속으로 부활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신약성서의 캐리그마 즉 예수의 신화적 행적들로 보이는 것들을 배제하고 철저히 변증법적 시각에서 예수의 삶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신약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던 존 도미닉 크로산은 예수의 물리적 육체적 부활을 부정하였다. 부활의 메시지를 비유나 은유의 상징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1세기에 나타난 고문헌의 자료를 통해 십자가형의 죄수들에게는 장례를 지내지 않았고 짐승의 먹이로 내버려 두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였다.

나는 여기에 어떤 주장도 합리적으로 제시할 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다만 성서 자체에 절대성을 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성서는 神에게 나아가는 하나의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이 나의 견해이다. ‘부활’이나 ‘구원’이 개인의 기복과 구원에만 국한된 것이라면, 이는 불교나 무속 종교에 있는 구원을 굳이 폄훼할 이유가 없다. 자기희생을 통한 사회적 의미를 구현해내는 차원의 구원이 아니라면 굳이 예수의 구원에만 매달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화한 것이 아니라 로마가 기독교를 로마화한 것처럼 기독교가 자본주의를 낳았지만, 자본주의가 기독교를 자본주의화 해버린 것과 같은 종교적 타락에 불과한 것이다. 막스 베버의 지적처럼 자본주의가 기독교화되기는 커녕 기독교가 자본주의화 되고 말았던 데에는 부패한 권력과의 결탁이 있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영락없이 중세의 타락을 재현해 내고 있다. 이제 한국 사회도 이런 신학적 허세와 위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종교개혁의 3대 원리가 되었던 ‘오직 믿음’, ‘오직 은총’, ‘오직 성서’는 이제 그 수명이 다하였다. 니체가 말한 대로 교회의 부조리한 횡포에 순종하며 계급사회를 강요당하는 ‘노예의 도덕’으로는 더 이상 주체적 인간의 삶을 살 수 없다. 지상의 삶을 포기하고 천상의 삶만을 추구하는 한 ‘교회는 무덤’일 수밖에 없다. 삶의 실천적 수련 없이 인간의 편리한 욕망만을 부추기는 ‘오직 믿음’ 사상은 한국 사회에서 중세의 면죄부보다 더욱 극악하게 타락하였다.

자신의 믿음이 어느 신학 노선을 견지하느냐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겠지만 ‘점수(漸修)’적 삶의 수련 없이 ‘돈오(頓悟)’적 구원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물론 구원은 주권자의 영역임에 틀림이 없지만, 교회에 십일조 따위나 기부하고 교단에 소속이 돼 있다는 이유만으로 신은 그를 믿음의 사람이라 인정하지 않으실 것이다. 인간의 얄팍한 속내에 결코 속아 넘어갈 분이 아니란 것이다.

‘예수가 스스로 부활’한 것인지, ‘하느님이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것’인지 나는 그 심오한 내막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기 위해 살리신 것이 진정으로 맞는다면, 그것은 무엇보다 ‘억울한 자들의 부활’이 우선되어야 한다. 기아와 질병으로 죽은 아프리카의 어린아이들, 세월호나 이태원 참사로 죽은 영혼들 그리고 공동체의 대의를 위해 죽은 열사들, 이 모든 억울한 이들의 죽음에 대한 구원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는 부자와 권력자의 편에 서지 아니하고 언제나 억울하고 소외된 자들의 위로와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 앞에 ‘역사적 예수’를 믿었네, 안 믿었네 하는 것은 신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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