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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와 베드로

고전번역학자 박황희 칼럼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 ‘밀양’에서, 전도연이 분한 ‘신애’는 남편을 잃고 나서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가 아이와 둘이 살게 된다. 그런데 이곳에서 그녀의 아들이 학원 선생에게 유괴를 당해 죽게 된다. 이를 계기로 예수를 영접하고 종교에 힘으로 자신의 고통을 이겨내던 그녀는 마침내 그 유괴범을 용서하기로 작정하고 교도소로 살인범을 면회하러 간다.

그런데 아들을 유괴했던 살인범은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자신은 이미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며 이제는 마음이 편안하다고 말한다. 이에 신애는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느님이 용서하셨다니, 어떻게 하느님이 그러실 수가 있느냐?”며 현실적 절망에 사로잡히는 내용을 담은 영화이다.

이 영화의 원작은 이청준 작가의 「벌레 이야기」다. 광주민주화운동 시에 시민에게 발포했던 계엄군이 스스로 자신을 ‘셀프 용서’한다는 모순을 다룬 이야기다.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는 이 한마디에 오롯이 담겨 있다.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한 악인이다.”

오래전 나와 함께 고전을 공부하던 어떤 여자 동학이 있었다.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프라이드를 주차하다 실수로 옆자리의 에쿠스 차량을 들이받았다. 자신은 가난하여 소형차를 타고 다니는데 상대는 대형차인 에쿠스이니 아마도 돈이 많은 사람일 것으로 생각하고 그냥 그 자리를 모면하고 말았다. 그러나 자신이 뺑소니를 친 것이 적잖이 찝찝하였던 그녀는 자신이 다니던 성당에 가서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였다. 그 후 그녀는 마음이 편해졌다며, 내게 자신의 이야기를 아무 스스럼 없이 전하였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와 예수를 부인한 ‘베드로’는 모두 예수의 제자로서, 스승을 배반한 죄를 지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유다는 회개를 하지 않아 지옥에 갔고 베드로는 회개하여 천국에 갔다는 것이 한국 교회들의 천편일률적 논리이다.

그러나 나는 복음서 어디에도 베드로가 회개하였다는 대목을 찾을 수가 없다. 예수가 잡히고 나자 예수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닭이 울자 ‘심히 통곡’하였다. 그 후 곧바로 자신의 옛 직업인 ‘갈릴리 어부’로 돌아갔다.

반면 예수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을 보고 ‘뉘우친’ 유다는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돌려주며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말하고는 그 돈을 성전에 내던지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었다.

두 사람의 회개의 장면을 굳이 찾는다면 베드로는 “심히 통곡(마 26 :75)”하였으며, 유다는 “뉘우쳤다(마 27:3)”라는 대목이다. 베드로와 유다의 차이를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해보면 한국 교회들의 수준은 참으로 가관이다.

나는 그동안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 가서 기도하는것을 회개로 착각하고, 교회 가서 기도만 하면 자동으로 용서가 될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무수히 보아왔다. 그러나 자신이 범한 죄를 당사자인 상대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면, 하느님도 결코 그를 용서해 주지 않으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서도 나는 여전히 마뜩잖은 의문이 있다. 많은 목사가 자살했기 때문에 회개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살은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스승을 배반한 후 곧바로 과거의 직업인 ‘어부’로 돌아간 베드로야말로 책임을 지는 태도가 아니라 책임을 회피하는 자의 전형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찌 베드로는 온전히 회개한 자로 묘사하고 유다는 회개가 아닌 ‘후회’ 또는 잘못된 회개의 표준쯤으로 격하하는지 모를 일이다.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는 자살한 것이 아니라 천벌을 받아서 비참하게 죽은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가운데 둘 중 하나는 명백한 허위이거나 둘 다 거짓말일 수도 있다. 이는 누가 옳고 그르다는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복음서 자체가 목격자인 제자들의 관찰자적 시점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제자들 사후에 추종자들 사이에 전해 내려온 전승의 기록인 까닭에 구전 과정의 오류가 있거나 아니면 당시 기록자들의 추정에 의한 개인적 사유가 가미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어찌 되었든 예수 사후에 곧바로 옛 직업으로 돌아갔던 무책임한 베드로보다 가룟 유다야말로 인간적인 책임을 다한 것이라 볼 수는 없는 것인가? 누군들 살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애통해하며 온전한 속죄를 하고자 했던 그를 어찌 정해놓은 답으로 비난만 할 수 있단 말인가?

만약에 독자들 가운데 자신에게 사면권이 있다면, 5.18 당시 양민을 학살한 계엄군으로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자살로서 속죄하고자 한 인생을 사면하겠는가? 아니면 교회로 숨어 들어가 예수 믿고 자신은 다 용서받았다며 천수를 누리고 사는 자를 사면하겠는가?

작금의 한국 기독교의 현실인 ‘밀양 유괴범’이나 ‘프라이드 여인’과 같은 ‘셀프 용서’에서 과연 어떤 도덕적 의미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에 비하면 유다의 회개는 천지가 개벽하고도 남을 만한 속죄가 아닐 수 없잖은가 말이다. 굳이 인간이 만든 교리라는 정해진 틀에 억지로 끼워 넣어서 해석하려 들 필요는 없다. 그저 자신의 행위나 철저히 반성하면 그뿐이다.

/박황희 고전번역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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