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경축사와 삼일절 기념사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주요 대외정책을 발표하는 가장 권위 있는 통로입니다. 과거의 예를 봐도 정권의 대일정책, 대북정책이 이 두 연설을 통해 발표되곤 했습니다. 그래서 역대 정권들은 삼일절과 광복절을 앞두고 각 부처와 전문가 집단을 대상으로 광범하게 아이디어와 의견을 수렴하며 연설을 준비해왔습니다.
윤석열 정권이 어떻게 대통령 연설을 준비하는지 모르지만, 연설문의 내용과 구성을 보면 메시지의 선명성에 비해 문장의 질이 매우 떨어지는 게 눈에 띕니다. 메시지의 선명성에만 온통 신경 쓴 나머지 그렇게 됐다고 생각하기에는 문장이 너무 허접합니다. 영국에 ‘퀸스 잉글리시’라는 말이 있듯이, 한 나라의 최고 지도자는 그 나라 말로 된 최고로 품위 있고 격조 높은 문장을 구사해야 하는데, 윤 대통령의 연설은 들을 때마다 큰 실망을 안겨줍니다.
저는 윤 대통령이 이제까지 한 3차례의 삼일절 기념사 및 광복절 경축사(2번) 중에서, 제104주년 삼일절 기념사가 최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길이도 역대 정권 기념사 중 가장 짧을뿐더러 일본의 폭압 통치에 전 국민이 들고 일어난 삼일운동의 의미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78돌 광복절 경축사를 보니, 그때와 수준이 막상막하입니다.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자유’라는 단어의 과다 사용입니다. 자유는 평등과 함께 현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이라는 걸 부정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연설문에는 평등은 없고 자유만 있습니다. 평등은 ‘공산주의’ 용어라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독립운동은 국민이 주인인 나라, 자유와 인권, 법치가 존중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라고 정의했는데, 과연 그것이 사실인가요? 역사학자들이 더욱 잘 알겠지만, 당시 독립운동의 최대 목적은 일본제국주의에서 벗어나 자주독립 국가를 세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다양한 세력의 운동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윤 대통령의 편협한 논리대로라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반독립운동가’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윤 대통령은 “자유, 인권, 법치의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라는 표현도 썼는데, 자유와 쌍을 이루는 평등을 빼고 자유만 보편적 가치의 항목으로 집어넣는 것은, 세계 보편적인 사상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전체주의가 대결하는 분단의 현실에서 이러한 반국가세력들의 준동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공산전체주의 세력은 늘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 왔습니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공산전체주의 세력, 그 맹종 세력, 추종 세력들에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대목이 윤 대통령의 자유관과 그 위험성을 잘 보여줍니다.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를, 자유를 훼손하는 공산전체주의자로 몰아 탄압하겠다는 협박으로 들립니다. 자유민주주의의 가장 큰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를 태연히 짓밟은 것도, 자유를 이렇게 편의적으로 생각한 데서 나왔을 것입니다. 윤 대통령은 최근 방통위, 한국방송, 문화방송, 언론진흥재단 가릴 것 없이 자유언론의 진지에 맹폭을 가하고 있습니다. 가히, ‘언론자유 대학살’이라고 불러도 될듯합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광복절과 삼일절만 되면, 한국 대통령의 연설을 긴장하면서 지켜봐 왔습니다. 하지만 윤 정부 들어서 이런 긴장감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규탄하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마당이었던 대통령 연설이 친일적인 내용으로 싹 바뀌어버린 탓입니다.
윤 대통령의 연설을 순차적으로 보면, 가장 첫 연설인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보편적 가치를 기반으로 양국의 미래와 시대적 사명을 향해 나아갈 때 과거사 문제도 제대로 해결될 수 있습니다”라고 비교적 점잖게 일본의 행동을 촉구했습니다. 이때는 그저 ‘보편적 가치’라는 단어만 썼지, 자유라는 말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기시다 후미오 총리의 서울 방문을 두 달여 앞두고 한 제104주년 삼일절 기념사에서는 갑작스레 일본을 “과거 침략주의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로 격상합니다. 인권이 보편가치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며 강제동원 피해 문제가 한일 간 가장 큰 인권 문제이고 그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에서 보면, 어불성설의 논리였습니다. 뒤돌아보면, 이 발언은 일본이 양보하지 않아도 우리가 일본의 요구에 맞춰, 강제동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예고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과거 군국주의 침략자’라는 수식어도 빼고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파트너”가 됐습니다. 아직도 일제의 식민 지배로부터 피해와 고통을 당하고 있고 그에 공감하는 많은 국민이, 윤 대통령을 ‘더할 나위 없는 친일정권’으로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오태규 언론인 전 한겨례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