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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 조작에 속지 않은 것이 시대의 어두움을 돌파하는 중요한 덕목의 하나가 되었다. 대한민국에 언론 조작이 지금 날뛰고 있다면, 종교 조작은 우리 곁에 혹시 없는가. 종교 조작에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종교 조작이 어떻게 행해지는지 우선 알아야 하겠다.
내가 종교와 무관하다면, 종교인은 내게 전혀 관계없는 사람 아닌가. 나는 직업 종교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종교인에게 아무 영향도 받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내가 종교인이든 아니든, 종교인을 보는 내 눈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나는 어떤 식으로든 종교인의 영향을 어느 정도 받으며 살 수밖에 없다.
내가 정치에 무관심하다고 해서 정치가 내게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듯이, 내가 종교와 종교인에게 무관심하다고 해서 종교와 종교인이 내게 영향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정치에 무관심한 대가로 악한 정치인에게 내가 지배당할 수 있듯이, 내가 종교와 종교인에 무관심한 대가로 악한 종교와 악한 종교인에게 내가 지배당할 수 있다. 나뿐 아니라 내 가족과 지인들이 악한 종교와 악한 종교인에게 지배당할 수 있다. 언론 조작이 없지 않듯이, 종교 조작이 없지 않다. 악한 언론인이 없지 않듯이, 악한 종교인이 적지 않다. 악한 언론인이 주는 피해와 해악이 적지 않듯이, 악한 종교인이 주는 피해와 해악도 적지 않다. 악한 언론인의 이름은 우리가 잘도 알아내면서, 악한 종교인의 이름은 왜 알아내려 애쓰지 않는 것일까.
스님, 목사, 신부들이 붓다, 예수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 여부는 그들 자신의 삶에만 관계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영향받는 사람들이 우리 곁에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의 적어도 30%가 종교를 갖고 있고, 평균 1가구에 1명은 종교 단체에 출석한다니, 내 집에 적어도 한 명은 종교와 관계있다. 종교인의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언제나 내 주변에 있다. 예수의 삶과 역사를 해설하는 이론을 기독론 또는 그리스도론이라 부른다. 그런데, 그리스도론은 양날의 칼에 비유할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선한 의미에서 도움을 줄 수 있고, 나쁜 일에 이용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론 역시 인간이 만든 이론이요 해설이기 때문에, 범죄와 조작에 이용될 수 있다는 말이다. 과거에만 그런 슬픈 사례가 있던 것은 아니다.
악한 종교인은 종교 조작 수법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종교 조작 수법을 즐겨 쓰는 사람이 곧 악한 종교인이다. 고의든 실수든, 예수를 잘못 해설하고 전달하는 종교인이 적지 않다. 악한 종교인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악한 종교인은 악의 현실을 알리거나 해설하지 않는다. 악의 세력에 속하는 사람의 얼굴과 이름을 언급하거나 밝혀주지도 않는다. 악한 종교인이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 대부분이 악의 세력에 속하기 때문이다. 악한 종교인과 악의 세력은 같은 패거리에 속한다.
둘째, 악한 종교인은 해방의 신비를 해설해주지 않는다. 악이 창궐한 곳에서도 악에 저항하면서 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절대로 설교하지 않는다. 악의 현실이 짙은 어둠처럼 도사리는 바로 그곳에서, 한 줄기 빛처럼 악에 저항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는다. 학문적으로 올바른 그리스도론 같아 보이지만, 악의 세력에게 자발적으로 복무한 그리스도론도 있었다. 악의 신비를 적극적으로 밝히지 않았거나, 악의 세력에게 억압 도구로써 이용당한 그리스도론도 있었다.
예수는 두 얼굴의 사나이였다. 억압받던 약자들에게 한없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끝까지 그들을 이해하고 위로하고 용서했다. 동시에 예수는 억압하는 강자들에게는 아주 위험한 사람이었다. 끝까지 그들을 욕하고 싸우고 논쟁했다. 부드러운 예수만 죽어라 설교하는 종교인이 많다. 그들은 위험한 예수를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그들은 겉으로 거룩한 종교인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악하고 교활한 종교인이다. 부드러운 예수 탓에 예수가 처형된 것이 아니다. 위험한 예수 때문에 예수는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부드러운 예수만 강조하는 종교인을 조심하고 또 의심해야 한다.
예수는 억압하는 강자들에게 지금도 위험한 인물이다. 예수는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편들고, 동시에 억압하는 사람들과 대결한다. 그래서 예수는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체념과 굴종을 강요하지 않고, 저항과 해방을 강조하였다.
그리스도론에 중립은 없다. 죽임당하는 생명 앞에 중립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 당하는 현실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종교인은 그런 참상을 빚어내는 공범이라고 고발당해야 한다. 악한 종교인은 사람을 속이고, 교회에 피해를 끼치며, 역사에 해악을 선사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고 있는 대한민국 백성이 처한 고통보다 우리를 더 깊이 고뇌하게 만드는 고통이 또 있을까. 예수가 악의 현실에 저항하고 해방의 신비에 봉사하는 일에 도움 되도록, 예수 참모습을 제시할 책임이 선한 종교인에게 있다. 악한 종교인은 비판받아 마땅하고, 선한 종교인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김근수 해방신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