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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교수가 왜 정치 얘기를 하냐"는 소리를 늘 듣는다.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대한민국 교육이 얼마나 심각하게 잘못됐는지를 느끼고, 30년 이상 교육에 종사한 사람의 하나로서 큰 책임감을 느낀다. 그런데 일반인이나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경제 얘기를 하면 "왜 (자신의 전공도 아니면서) 경제 얘기하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정치 얘기를 금기시하고, 혹은 정치 얘기는 순수하지(?) 않은 의도를 가진 것으로 여기는 풍조가 의외로 많이 퍼져 있다. 과거 칼럼에서 지적한 얘기를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대학 신입생들이 기본 교육이 안 되어 있다는 생각 끝에 내가 얼마 전부터 경제학을 처음 접하는 학생들에게 소개하는 내용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왜 함께 사는 방식을 선택했을까? 함께 사는 것이 생존과 번영을 위한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함께 살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동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것이 바로 '정치'이다. 예를 들어, 공동주택인 아파트에 살아도 공동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민대표를 선출하고, 주민들은 주요 문제들을 직접 결정한다. 이 모든 것이 정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경제와 정치는 태초부터 인간이 '사회적 동물' 방식의 삶을 선택한 순간부터 외면할 수 없는 '주제'였다. 정치 얘기는 선동이 아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모든 국민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경제와 정치 문제의 해결 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 왔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의 부의 축적을 허용하는 '시장경제'를, 그리고 동시에 구성원 사이의 대내적 공존을 추구하는 '민주주의'를 채택하였다. 절묘한 역사적 조합이었다. 시장은 '1원1표 원리'가 지배하는, 즉 경제적 강자가 지배하는 영역이고, 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주주의는 '1인1표 원리'에 기초하기에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는 경제적 약자의 의사가 반영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외적으로는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안보를 사회 구성원 모두의 공동목표로 삼고 있다. 이처럼 현대 사회는 이기심과 돈의 힘이 지배하는 시장과 모두의 공존을 추구하는 민주주의가 상호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도록 만들어졌다. 정치를 경제와 분리할 수 없는 이유이다. 정치를 외면하고, 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으면 돈의 힘이 지배하는, 경제적 강자가 지배하는 사회로 전락하고, 끝내 사회 균형이 파괴되기에 정치와 경제는 분리 자체가 불가능하다.
여기까지는 근대 문명사회의 공통적 모습이다. 그런데 차이도 존재한다. 자기 힘으로 근대 사회로 진화한 서구 사회의 주도 세력은 부르주아와 군사권력을 장악한 왕과 귀족들이었다. (서양에서) 근대 사회와 구분되는 중세 사회의 특징은 물리적 힘으로 경제력을 축적하고 경제력이 다시 물리적 힘을 확장하는 원천이었다는 것이. 그 결과 보다 많은 토지와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적 경쟁(귀족전쟁)을 하였고, 그 결과는 권력의 중앙집중(절대왕정)을 가져왔다. 이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새로 부상한 상공업자(부르주아)의 협조와 지원을 얻어내는 것이 불가피했고, 그 결과가 권력의 분산이었다.
그리고 (국가 간 권력 경쟁을 해야 하는) 절대왕정과 (해외에서 부를 축적하려는) 부르주아는 대외적(제국주의적) 팽창이라는 공통 목표를 가졌다. 서양의 보수가 자국 이익 중심의 국가관을 갖게 된 배경이다. 자민족 중심주의인 민족주의와 결합하면서 서양의 근대 사회에서 자국 이익 중심주의는 전체 사회에 뿌리내린다. 좌파와 우파, 학계와 비즈니스계 등을 막론하고 서양의 엘리트들이 국가 이익과 관련이 있는 대외적 문제에 대해서 한목소리를 내는 이유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근대 프로젝트에 실패했다. 주지하듯이 백성을 전쟁의 참화 속에 집어넣은 양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왕의 권위는 무너지고 (자신보다 힘이 강한) 외세에 기생하거나 혹은 오로지 외세만이 두려운 권력층이 국가권력을 사유화하고 백성을 착취하여 국가는 망가지고 백성은 생존 위기에 내몰렸다. 그 결과가 일제 식민지 전락이고, 분단이다.
외세에 대한 열등의식이 강한 매판적 특권층은 해방 이후에도 '분단을 내세워' 자신을 보수로 가장하고 이 나라의 주류를 자처해왔다.
이처럼 한국의 '특권층 카르텔'이 서양 보수와 다른 것은 민주주의 사고가 없는 특권의식 소유자이자 '국익에 대한 사고가 취약'하다는 점이다. '의식의 식민화' 결과이다. 우리 사회 주요 분야에서 대다수 엘리트가 미국인보다 더 미국적으로 사고하는 배경이다. 앞 세대들이 일본인보다 더 일본적으로 사고한 것의 연장이다. 그러다 보니 일반 국민조차 "힘이 없는 나라가 어떻게 하냐"며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계속>
/최배근 건국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