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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권력 앞의 호모 사케르(2)

그럼에도 일본이 처리비용을 줄인다는 경제적인 이유로 원전 오염수를 방류해 일본 주변 바다와 한국과 중국의 바다, 나아가 태평양까지 오염시키려는 행위는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 대한 심각한 범죄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한국이 오직 일본의 이익만을 위한 이런 결정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 어민들을 위한 생계 대책, 향후 방출수에 대한 인근 국가 중국과의 공동 조사 등을 당연히 추진해야 한다. 그런데 이 정부는 그 반대로 간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1952)으로 이미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 관련 배상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이승만도 이렇게까지 한국의 주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하지는 않았다. 국가 경제발전이라는 명분 하에 한국 청년들의 목숨을 베트남 전쟁에 바친 박정희도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한국 병사의 월급 한 푼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지속적인 협상을 했다. 이들 독재자들은 비록 국민의 생명은 우습게 여겼지만,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을 인지하고서 미국과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 정치의 틀 속에서 나름대로 몸부림 친 흔적은 있다. 그런데 이 윤석열 정부는 협상은커녕 애초부터 줄 것은 알아서 다 주자는 입장인 것 같다.

벌거벗은 권력은 국민주권 이전 시대의 권력이다. 윤석열 정부의 외교에는 미국과 일본의 이익이 곧 우리의 이익이라는 근거 없는 전제 아래 행동하는 것 외에 국가와 국민의 개념 자체가 없다. 사실 이 정권에게는 힘 있는 사람들만 국민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국민이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돈이 있기 때문에 보호를 받고, 권력과 돈이 없으면 보호받지 못한다. 죽는 놈만 불쌍하다.

대외적 주권 부재는 대내적 국민주권 상실이다. 즉 대통령의 자의적인 인사권과 사면권 행사, 정치검찰의 압수수색과 구속기소에 국민들의 인권, 알 권리, 언론 자유는 압살된다. 고 채수근 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려는 수사단장을 항명죄로 기소하고, 이 병사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사단장은 아예 수사선상에서 빼버렸다. 세월호 유가족을 사찰하고 기무사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계엄령 문건 작성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소강원 기무사 참모장을 8.15 특사에 포함시켰다. 채수근 상병의 죽음은 원인 모를 죽음으로 덮여질 가능성이 커졌고, 세월호 유족은 두 번 죽게 생겼다. 

왜 한국은 갑자기 이런 주권 이전의 상태가 되었을까? 국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도 있고, 언론도 있고, 시민단체도 있는 지금,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정권이 교체된 지 1년이 겨우 지난 시점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우리의 질문은 바로 여기에 있다. 대통령이 취임 후 단 한 번도 야당 대표를 만나지 않아도 되는 일, 국민을 향해 협박성 8.15 기념사를 할 수 있는 이런 일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당 내부에서도 어떤 이견이나 견제도 없고, 언론의 견제도 없는 이 전체주의 상황은 어디서 온 것일까?

이것은 푸틴의 우크라이나 전쟁 도발로 12만 명의 자국 병사들이 목숨을 잃어도 그것을 종식시키는 투쟁이 일어나지 않는 러시아 상황과 다를 바 없고,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하여 자국의 군인 5천 명이 목숨을 잃어도 그 전쟁을 끝내자는 집단적 항의가 없었던 미국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결국 민주주의의 실종, 독재자나 권력자의 잘못된 판단이나 결정을 교정하지 못하는 기성 정당이나 정치가들의 기회주의와 언론의 타락이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희생양, 즉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권력자의 결정을 견제하거나 비판하지 못하는 보통 시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에도 책임이 있다. 근본적으로는 선거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사실 지금과 같은 선거 민주주의와 과거의 국민주권 부재의 전제군주 시절과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 모른다. 민주화가 되고 국민의 교육 수준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이러한 주권 상실의 초유의 사태는 110여 년 전 일제가 총칼을 들고 조선의 주권을 유린하고 헌병경찰 통치를 시작했을 때 조선 사람들이 그런 폭력적 질서에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한 이유와 별로 다르지 않다. 러시아나 미국이나 오늘의 한국인이나 110여 년 전의 한국인들이나 생존의 압박, 즉 먹고 살기 위해 너무 바쁘고 정치에 관심 가질 여유가 없다. 그러다가 전쟁이 나면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고 죽는다.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쳤는가 나중에 탄식하면서 울부짖는다.

민주당 다선 의원들 대다수는 내년 총선 당선을 위해 주판알을 튕기는 것 같고, 몇몇 초선 의원들만 정권 비판에 바쁘다. 그런데 이 벌거벗은 권력의 행사를 중단시키지 않는 한, 야당이 다수 의석을 차지하기도 어렵지만, 아예 그 전에 국가가 무너질 수도 있다. 각자 가진 권력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정치가, 언론인, 지식인, 그리고 일반 시민 모두가 이 주권 부재 상태에 책임을 갖고 있다. 우리는 벌거벗은 생명으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소리를 질러야 한다. 헌법상의 민주공화국을 다시 세우는 일을 모두가 시작해야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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