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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펜하이머, 빛을 꿈꾸는 사람들(1)

소셜칼럼니스트 강미숙 칼럼
장안에 화제인 영화 ‘오펜하이머’를 뒤늦게 보았다. 간간이 들리는 “어렵다”는 말에, 과학에 무지한 나로서는 복잡한 수학공식이나 과학적 지식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지레 겁을 먹었다. 하지만 영화는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과학과 정치’의 관계를 다룬 지극히 정치적인 영화였고, 후반부로 가며 매카시즘에 먹잇감이 된 과학자의 얄궂은 운명이 영화의 날실 역할을 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영화관을 나오며 들었던 생각은,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 또는 고차원적인 사고를 하는 한 인간을 설명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긴 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주도한 과학적 성과가 군대와 정치에 종속되었음을 깨달은 오펜하이머는 1946년 1월부터 원자력에너지의 국제통제를 제안하는 등 전후 군비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자 한 미국의 뜻에 반하는 언행을 했다. 이에 FBI는 정치적으로 공박하기 위해 8천 페이지가 넘는 증거자료를 수집했다. 하지만 자택과 사무실을 불법 도청한 기록과 뻔뻔한 거짓말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과거의 팩트를 현재 시점에서 악의적으로 재단하는 비열함을 보였다. 그리고 언론은 그의 과거 정치활동과 정책 제안을 왜곡하는 기사를 무수히 쏟아냄으로써 대중의 열광으로부터 격리시키는 데 일조했다. 인류에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시작한 일이 모순되게도 인류에게 재앙을 안겨준 비극을 겪으며 과학자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겠노라 선언한 오펜하이머에게 이데올로기를 들이댄 FBI는 필요와 입맛 따라 기소권과 수사권을 남용하는 한국의 검찰과 닮은꼴이다.

영화의 상당 시간을 할애하는 1954년 보안심사 청문회는 오펜하이머가 견뎌야 했던 고통과 치욕의 시간인데 한 사람의 인생이, 민주주의가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지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와 연관된 자신의 전력을 부정하지 않았다. FBI와 내통한 청문위원도 그가 “공산주의 활동에 끌린 근본적인 동기는 사회적 정의에 대한 소망과 이상적 세계에의 동경이라는 숭고한 것”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와 완전한 결별을 하지 않은 게 죄라고 했다. 권력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 하여 한 과학자의 삶과 생각을 이데올로기라는 좁은 틀에 가두고 졸렬하게 사상검증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은 권력의 본질이다. 1964년 이때의 방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쓴 동독출신 작가 키프하르트의 기록극, <오펜하이머 사건>은 TV와 연극으로 옮겨져 큰 관심을 모았는데 영국의 한 비평가는 “사람들이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평가했다. 세계의 복잡성만큼이나 난해한 한 인간을 이해한다는 것, 개인의 행동과 사회(국가)와의 관계를 설정한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놀란 감독의 영화를 본 후 키프하르트의 기록극(희곡)을 읽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과 ‘인류에 대한 충성’ 사이, 과학적 발견과 도덕적 책무 사이, 그리고 원자폭탄이 가장 큰 효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목표지 선별에 기술적 자문까지 하고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으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일종의 정신분열 상태에 놓인 천재과학자의 머릿속이 핵분열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국가에 충성을 다한 애국적인 과학자를 정치적인 이유로 공산주의자로 몰아가는 청문회를 보며 100만 명이 넘는 진보적인 학자와 예술가, 정치인을 직위해제하거나 추방시킨 매카시즘의 광기를 상기했다. 동시에 냉전 때나 있었던 일이 오늘날 고스란히 재현되는 진부한 현실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철지난 이데올로기 타령으로 신냉전을 연출하는 현실에서 자신의 신념보다 권력의 의지에 복무해야 하는 공무원과 학자들, 이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며 감내해야 할 시민들의 정신분열까지도…

권위주의적인 정부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견해를 유지하거나 제대로 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어렵다. 파커 J. 파머는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 낯선 사람이나 의견을 만나는 과정이 곧 공적인 삶이며, 이는 민주주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새해 첫날이 낯설어서 ‘설’이라 한 것처럼 낯선 것은 평소 자신이 보고 듣던 것과는 다른 무수한 것들이다. 한 사람이 살면서 접하는 세상은 얼마나 좁고 제한적이던가. 과학자의 세계에서 낯선 것은 ‘연구를 멈추자’는 것이며, 국민의 안전을 도외시하는 이들에게 핵폐수 방류가 인류에게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은 불편한 것이 된다. 하지만 낯설고 불편한 것을 기꺼이 허용하고 토론하는 사회가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며 이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어느 진영이든 전체주의에 다름 아니다.

전체주의도 아닌 공산전체주의. 지난 8.15 광복절 축사에서부터 윤석열 대통령은 일관되게 공산전체주의라는 듣도 보도 못한 개념을 들이대며 자신과 생각이 다른 국민과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육군사관학교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이전 문제에 대해 국민이 공분하고 있음에도 “잘못된 것을 가만히 놔둬야 하느냐”며 역사 바로 세우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세상 모든 일에 ‘잘못된’이라는 가치판단 권한을 독점하고 있다는 인식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발언이다. 골목대장 소영웅주의에 빠진 대통령의 말은 점점 신냉전의 시대로 시계를 돌리기 바쁘다.

<계속>

/강미숙 소셜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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