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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무백열 - 松茂栢悅

춘추시대 진나라 윤기(陸機)라는 사람이 쓴 문장에 탄서부(歎逝賦)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세상사의 사라져 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운 마음을 토로한 명문장으로 그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다.

소나무가 무성해지면 진실로 잣나무가 기뻐하고, 지초(芝草)가 불에 타니 오호라 혜초가 한탄하네.”

[信松茂而柏悅, 嗟芝焚而蕙嘆.]
-신송무이백열, 차지분이혜탄.
위의 글에서 송무백열(松茂栢悅)’ 혜분난비(蕙焚蘭悲)’의 고사가 탄생하였다.
한 세상 살다 보면 누구나 이웃 간의 애사경사를 종종 만나게 된다. 지인들에게 애사와 경사 중에 어느 쪽을 더 중요시하느냐고 물으면, 대개는 경사는 못가도 애사는 반드시 참석한다고들 말한다. 슬픔을 당한 사람을 위로하고자 하는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 심리의 내면을 깊게 고찰해 본다면 애사에서 더 큰 위로를 받는 쪽은 오히려 방문자이다
. 재앙을 당한 이웃을 문병하거나 문상하면서 상대를 위로하기도 하지만, 그 기저에는 재앙에 걸려들지 않은 자신을 안도하고자 하는 보상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웃의 경사에 흔쾌히 방문하지 못하는 내면의 심리는, 상대를 진심으로 축하하고자 하는 마음보다는 자신의 처지와 비교되는 마음 때문에 선뜻 참석하지 못하는 것이다. 주자의 친구였던 여조겸(呂祖謙)은 그의 저서 동래박의(東萊博議)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환난을 함께 겪기는 쉽고, 이익을 함께 나누기는 어렵다.”
[共患易, 共利難]
환난은 사람들이 다 같이 두려워하는 바이고, 이익은 사람들이 다 같이 바라는 바이기 때문에 다 같이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면 형세 상 반드시 화합하고, 다 같이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형세 상 반드시 다투게 된다. 고난에 함께하기는 쉬워도 성공을 함께하기는 어려운 것, 이것이 곧 인간의 본성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속담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대한민국의 속담을 예로 들 것이다
. 그것은 바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과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라는 속담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마땅히 축하하고 부러워해야 할 일이지, 그것을 배 아파한다는 것은 매우 옹졸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부러우면 진다는 말은 상대의 성공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태도이다. 상대의 성공을 축하하고 배워서 나에게도 도전의 기회로 삼아야 할 일이지, 상대의 성공이나 성취를 인정하지 못하고 나는 능력이 안 돼서 못사니 너도 사서는 안 된다는 것은, 지독한 패배주의요 열등의식의 발로이다. 노골적으로 심하게 표현하자면 식민지 노예근성의 천박한 한계를 보이는 행위에 불과하다.

여조겸은 이어서 전자의 문장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

자신의 공이 없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남의 전공(戰功)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不慙己之無功, 反不容人之有功]
한국인들은 남의 성공을 인정하는데 매우 인색하다. 늘 공격과 지배를 받아온 타성적 관습이 있고 지정학적으로도 대륙과 동떨어진 반도에 위치한 편방 민족의 한계성을 안고 있어서 중원을 제패하거나 대륙을 선제적으로 공격해 본 적이 없다.

성공해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상대의 성공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욕구 또한 강하다
.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욕구는 무의식 가운데 자신의 무능을 위로받으려는 심리가 내면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누가 나의 진정한 친구인지를 분별하고자 한다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보면 쉽게 답을 얻을 것이다. 만약 내가 20평 집에 살다 60평 집을 사서 이사 가게 되었다고 가정할 때, 자신의 집 평수와 비교하지 않고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 누구일까? 내 자식이 고시에 합격하였을 때 자신의 자식과 비교하지 않고 내 일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 누구일까?

우리는 흔히 비를 맞는 사람과 함께 비를 맞아주고
,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좋은 친구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만일 그가 당신의 성공을 축하하지 못하고 배 아파할 위인이라면 그와는 결코 친구가 되어서는 안 될 사이임을 깨달아야 한다. ‘애사에 참석하는 일은 동정으로도 가능한 일이지만, ‘경사에 참석하여 상대를 축복하는 마음은 그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벗과의 교분을 나눌 때 송무지락(松茂之樂)’의 마음을 우정의 근본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애사를 위로해주기보단 경사에 가족처럼 기뻐해 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곧 진정한 친구인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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